툇마루

놀이터에서의 추억 - 독일의 여성해방 유감

서동철 2010. 3. 28. 03:42

딸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유치원 끝난 뒤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고 놀이터를 찾았다. 지 아빠를 닮아 워낙에 밖에서 뛰어 놀기를 좋아하는 활달한 딸아이를 둔 덕에 겪을 수 있었던 행복에 겨운 일거리였다.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딸아이는 친숙한 놀이터동무들한테로 달려갔고 나는 딸아이와 내 자전거들을 한 쪽에 세워 두고 놀이터 변두리에 놓여 있는 벤취에 자리잡고 앉자마자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곤 했다. 거의 매일 반복되어 보여지는 이러한 모습에 힘입어 – 후에 들은 얘기다 - 그 곳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내게 별명이 붙여졌다 – ‘책 읽는 남자’. 어울리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노릇이, 딸아이와 함께 집에 돌아갈 때까지 책에서 눈을 거의 떼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논문 쓰느라 읽고 참고해야 할 책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 지금 되돌아보건대 쪼께 무리할 정도로 독서삼매경에 빠지지 않았나 싶다. 단지 이러한 나를 변호할 변명거리 또한 내 갖고 있다. 


놀이터 출근 첫 날부터 독서삼매경에 빠지진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를 찾은 부모들과 이런 저런 얘기 나눔을 꺼리지 않았다. 아니, 부모라기 보다는 모 즉 아낙네들이라 해야 옳을 게다. 지금 내 기억에 놀이터에서 아이를 데리고 온 뭇 남자와 얘기를 나눈 적은 극히 드문 예외적인 경우였으니 말이다. 거의 전부가 여자들이었다. 애를 혼자 키우는 여자들도 있었으나 나와 직접 말을 섞었던 여자들 중에는 오히려 남편을 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집에서 자기들이 맡은 역할, 집안 살림 살피고 애 보는 일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심찮게 들었던 해방된 독일여성의 모습하고는 꽤 먼 거리를 두고 있지 않았나 싶다.  

더군다나 – 바로 이 점이 나로 하여금 그 독서삼매경에 빠지지 않으면 아니되게끔 만들었던 주범이다 – 한국에서도 악명높은 여자들의 수다 또한 내 몸소 겪어야만 했다. 첫 만남의 서먹서먹함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마자 몇몇 여자들은 자신들의 일대기를 옛날이야기 형식으로 꽤나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으며 학교생활은 어떠했고, 심지어 연애는 그저 그렇더라 등등. 내가 왜 이리 남들이 코풀고 똥누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오리매중 속에서 헤매며 어쩔 수 없이 예의상 들어(줘)야 했다. 그래도 침 튀겨가며 입 놀리느라 애쓰고 욕보는데, 때론 측은지심까지 발동했다. 이외에 일상의 살림꾼적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야 했다. 어디가면 배추를 싸게 살 수 있으며 어느 옷가게에서 아기옷을 세일한다느니, 어느 가구점에서 며칠 전 자기는 실한 가격으로 부엌 찬장을 장만했고 어제 슈퍼에서 싼값으로 냄비를 샀다는 등의 무지막지한 자랑과 선전을 말이다. 나 역시 가만 있자니 그런 엄청난 생활정보를 낼름 받아먹기만 하는 모습에 미안하고 남세스럽기도 하고 해서 언젠간 한 백화점에서 싸고 실한 값으로 식칼을 장만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기억이 여적 남아 있다. 


일년인가 이년쯤 뒤 딸아이가 하루는 혼자서 놀이터에 놀러간다는 효녀다운 제안을 하길래 아이스크림을 곱배기로 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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