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 측간에 앉아 있노라니 Hölderlin의 시 Der Rhein의 한 구절과 함께 잡념이 떠올랐다:
"Denn schwer ist zu tragen
Das Unglück, aber schwerer das Glück."
(왜냐하면 추스리기 힘든 것은
불행이나, 더 힘든 것은 행복이니.)
불행 추스리기도 힘들지만 행복 추스리기가 더 힘들다는 휄덜린의 말은 역설적 표현의 한 좋은 예다. 일상의 이해로는 추스리기 힘든 것은 불행이거늘 이보다 더 힘든 것이 바로 불행의 반대인 행복이라는 진리를 추스리기 힘들다는 표현을 빌어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다시 말해 불행하면 연상되는 것이 추스리기 힘든 것이니 불행의 반대인 행복은 그럼 추스리기 쉽다는 연상이 됨이 일상의 이해인 바 이를 뒤엎고 오히려 더 힘들다 하니 읽는 이에게서의 매겨짐이 그 효과 면에서 배 이상이 되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추스리기 힘든 것이라는 진리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말하기 위해 그의 반대격인 불행을 내세웠으며 덧붙여 일상의 이해를 뒤엎는 역설적인 댓구 표현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셈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효과를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어구는 물론 아니라 본다. 그는 그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삶의 지혜를 일찍 터득한 독일 예술사의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의 언어, 그 엄청난 힘의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Heidegger 조차 '아직도 우리의 시대 정신은 휄덜린을 완전 이해할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탄하지 않았던가.
이와 비슷한 역설적 표현으로 환호는 그와 반대되는 침착함에 의해 동반될 때에만 진정한 환호라는 표현 또한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물론 휄덜린의 말이다. 환호는 환호하는 자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어떠한 계기로, 어떠한 전체적인 맥락 하에서 환호를 하는 지를 아는 경우에 진정한 환호라 할 수 있는 바 이러한 앎은 침착함없이는 불가능하니 침착함이 동반된 환호만이 진정한 환호라 할 수 있다는 논리다.
제대로 환호하며 행복을 추스리는 것도 그러고 보니 어렵고 또 그만큼 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