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淡莫如水
好德宜行仁
影動天心月
勸君尋此眞
하고 이운규가 김항한테 일렀다 합니다. 이에 김항은 19년 동안 밤이나 낮이나, 자나 깨나 세 번째 행의 영동천심월에 대해 머리를 이리 저리 굴리고 생각을 요모 조모 모았는디, 글씨 그라던 중, 어느 날인가 문득 그리고 퍼뜩 正易이 보였다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고백부터 합니다: 저는 아직 이 영동천심월의 뜻을 완전히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래 둔한 놈이라 이해가 굉장히 느려요.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해하고자 하는 작업 자체가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이해한 주역과 정역의 지식을 바탕으로 바라 보아도 그냥 내팽겨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우리 겨레의 정신적 자산입니다. 물론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내용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허나 만약 아우님께서 나는 여기까지는 이해를 이리 해서 받아들이겠는데 그 이상은 곤란하다는 식의 말씀을 주셨다면 왜 님께서 이를 시간 낭비라 보시는지 저의 이해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문제는 신비주의입니다. 작금 전국 방방 곡곡에 널려 있는 상업적 단학 수련원이니 뇌호흡 수련원 이니 하는 곳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는 그 선전적 신비주의 말입니다. 이 님들에게는 장사, 즉 돈을 벌기 위한 빌미로서만 그 수행이 의미를 가진다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전이 또 통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수행의 방법들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맛보기가 무척 힘들어졌습니다. 이것 갖고는 장사가 되지 않으니까요.
저는 소위 신통력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러한 능력은 예외 없이 우리 마음 속의 한님이 주신 선물이매 만약 이에 도달하는 방법을 주위 님들에게 전해 주고 싶다면 그냥 보수 없이 베풀어야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지난 몇 년간 세계 시장에서 태권도라는 상품을 갖고 제법 되는 장사를 하더만 이제는 이러한 수행 방법을 상품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허나 동시에, 그리고 바로 그 장사적 신비주의의 폐단 때문에서라도 이 수행 방법에 대한 객관적 학문화의 작업이 뒤따라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러한 수행의 전통이 우리의 뛰어난 정신적 유산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적인 논거는 차치하고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 적지 않은 우리 조상님들께서 이에 몰두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수운 최제우 또한 그 중의 대표적인 한 사람입니다. 이 양반의 東學은 어찌 보면 조선 좌방과 우방 仙家의 종합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어떠한 방향으로 그 객관적 학문화가 진행이 되더라도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점은 이러한 보다 더 뚜렷한 방법론을 잣대로 내 스스로 수행을 통한 내 몸의 변화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럼으로써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신비주의라는 껍데기를 하나씩 둘씩 벗길 수 있지 않을까 감히 말씀 드립니다.
오래 전 지리산 토굴에서 이삼 십년 이상을 사시는 분과 이 점에 대해 한번 대판 싸움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 님은 님 나름대로 극히 진지하게 산신령이니 신통력이니 말씀을 하시길래 그렇게 SF 같은 말씀만 하시지 말고 그러한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지 못한 내게 설득력 있게 님께서 어떠한 경로를 통해 그런 경험을 하셨는지 차분히 말씀해 달라 부탁드렸더만, 그건 말로 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시더군요. 하여튼 꽤나 오래 싸웠습니다.
그럼 -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옆에서 욕을 무지 듣네요, 짧게 매듭 짓습니다 - 왜 이런 수행을 하느냐, 도데체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개인의 신통력 획득이라는 영달이냐, 아니면 또 다른 뭐이 있느냐? 저는 단언합니다:
사랑입니다. 수행은 나눔이요, 사랑이요, 봉사고 헌신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꼽는 지난 세기 최고의 수행자들 중의 한 분은 따라서 - 테레사 수녀입니다.
제가 일 전에 모자란 머리로 끄적거린 문구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修行은 사랑하는 生活을 위한 練習이다. 단지 이 때 말하는 사랑이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다. 그것도 오로지 주는 사랑일 뿐이다. 받음에 대한 期待가 전혀 없는 사랑이다. 그렇다고 짝사랑은 아니고. 이 짝사랑은 받고 싶은 데 못 받으니 안타까운 사랑이고, 修行의 사랑은 오로지 그 주고 나눔에 기쁨으로 充足되는 그런 사랑이다.
그럼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도 내 주어라 하는 그런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의 바로 그 사랑인가? 이 사랑 또한 수행에서 말하는 사랑의 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만약 그럼으로써 그 원수를 더 이상 원수 아니도록 만들겠다는 목적 의식이 없다면. 수행인은 원수를 일부러 찾아가며 사랑하지는 않는다. 아니 수행인이라면 원래 원수가 없어야 한다. 감정상의 어긋남을 경계하는 생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내 귀에 거의 강요하는 듯 들리매 이와 수행과의 어떤 긍정적 끈을 엮기가 힘들다는 고백 또한 한다.
周易 咸卦의 가르침이다:
象曰, 山上有澤, 咸, 君子以虛受人.
修行的 사랑의 前提 條件이 바로 이 虛心이다.
제가 님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면 이에 큰 절 올리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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