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

30년 전

서동철 2016. 5. 3. 19:43


며칠 전 이 곳 뉴스망에선 야단법석이었다. 30년 전 체르노빌 사태 때문이다. 아, 그렇구나, 맞아, 1986년이었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바로 그 해 가을 구월 말에 난 독일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독일에 온지 30년 거의 꽉 채운 셈이다. 삼십년, 환갑이 아직 넘지 않았으니 대한민국에 태어나 살았던 시간보다 이 곳 독일에 머문 시간이 더 길다는 얘긴데, 참, 세월 무지 빨리 간다. 얼추 십년 머물 생각으로 한반도를 떠났는데 어 하다 보니 이 곳 유럽 대륙에 붙어 버렸지 싶다. 이젠 알프스 때문에라도 다시 돌아가고픈 마음 사실 없다. 세계화시대에 뭐 어떠랴 하며 자위하기도 한다만.

그 때, 태어 나 처음으로 비행기 타고 알라스카를 거쳐 새벽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뒤 곧장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달렸다. 지금마냥 러시아 상공을 비행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유학하려면 대한민국 정부 유학시험을 치뤄야 했던 시절이었고. 독일에서 대한민국에 편지를 쓸 때 겉봉 주소에 그냥 한국이라 적지 말고 남한으로 쓰라는 교육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래야 그 편지가 북한으로 잘못 배달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학생 기숙사에서 어울려 지냈던 아이들 기억 또한 떠오르는데, 절로 웃음이 나온다. 독일 아이들은 물론이고, 니게리아, 카메루운 등에서 온 아프리카 젊은이들과의 어울림 또한 내겐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중국 학생들 또한 적지 않았다. 어릴 때 중공 오랑캐 읊으며 백안시 했던 사람들이라 처음 만났을 땐 적지 아니 서먹서먹 했다만, 여자든 남자든 자연스레 알고 지내는 관계를 맺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내가 워낙 무게 있어 보여 그런가 대부분 중국 사람들 나를 꽤 어려워하더만. 물론 가끔씩 호떡집에 불났다 하듯 왁자지껄한 모습들 또한 겪었고.

몇몇 동포 내지는 교포들 또한 알고 지냈다. 처음 어학당 다닐 땐 주어진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적지 않은 한국사람들 알고 지내야 했지만, 시간이 갈 수록 그 수는 대폭 줄었다. 내 성격이 워낙 고약해 오래 사귀기가 꽤나 힘들어 그랬을 게다. 그래도 예외는 있었다: 한 부부를 알고 지냈는데, 남자는 화학 박사과정이었고 그 마누라는 나와 어학당 동기였고, 이 사람들과는 그 사람 박사과정 끝내고 귀국하기까지 줄곧 친하게 지냈다. 내 가끔씩 한국 음식 먹고 싶을 땐 괜스레 그 사람 집 찾아가 무지 먹었다. 살림 꾸리기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가만 뒤돌아 보니 이 사람들 기억이 새롭다. 그네들 지금 독일에 산다면 내 유일하게 접촉하는 한국사람들이겠다 싶다. 지난 연초엔 내게 메일을 보냈더만. 잘 있다고 답을 하며 잘 있냐 되물었더만 위암에 걸렸었는데 수술하고 회복 중이라고. 이 소리 듣고 말문이 막혀 지금까지 아무 소리 내지 못하고 있다. 며칠 전 이 곳 블로그에 들러 방문록에 흔적을 남겼던데, 참 반가왔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과 삼십년지기다. 건강하시라.
 

'툇마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정 농단  (0) 2016.12.16
촛불  (0) 2016.12.06
뮌헨  (0) 2015.10.08
...  (0) 2015.05.12
삶과 죽음  (0) 2015.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