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가끔씩 들리는 말이다. 특히 대한민국 정치인들끼리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아우성치는 마당에 들리곤 한다. 깜냥 되지 못하면 조용히나 있지 왜 이리 설치냐 뭐 이런 모습이다. 아이들 티겨태격 하는 모습이니 그 바닥 수준에 딱 걸맞는다고나 할까. 어쨌뜬 깜냥, 그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울림이 꽤나 인상적이다. 깜냥. 근데 자기 능력대로 사는 모습, 자기 깜냥에 걸맞는 삶, 결단코 중요하다. 단지 쉽지 않아 문제긴 문제다. 자기를 알고 또 아는대로 솔직히 움직이는 모습이니 그렇다. 달리 말해 뭘 하든 너무 큰 욕심 부리지 말고 자기 분수에 맞게, 재량껏 스스로를 자기 본래 모습에 맞춰가며 사는 모습이다. 허나 우선 이 앎 자체가 어렵고 나아가 그 앎대로 사는 솔직함 또한 실천하기가 실제 쉽지 않다. 자기 스스로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고 나는 바로 이렇다함을 그대로 보이는 용기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근데 때론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아니 깜냥이 되지 않음을 자타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실제 겪곤하니 말이다. 산행을 예로 들자면 마흔 넘어 산행의 참맛을 느끼기 시작한 내가 메스너나 캄머란더 등 세계 최고의 산악인들이 이루어 낸 산행을 하기엔 너무 늦었음을 알고 있다. 그네들은 더군다나 태어나 자란 곳이 바로 알프스 깊숙한 산골이었기에 나마냥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과는 다른 태생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만약 십대에 그 참맛을 알기 시작했다면 다를 수도 있었지 싶다. 그런 경우 철학박사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게고. 그렇다고 지금 이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여적 해 놓은 일이 없기에 뽐내고픈 철학박사 타이틀은 아니라 해도 내 나름대로 삶을 제대로 꾸리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경주했음에 일말의 자부심은 품고 있다.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독일고전철학을 전공한 내가 칸트나 헤겔이 이루어낸 업적에 버금가는 철학적 결과를 내놓기엔 깜냥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독일 말글 역시 내겐 외국 말글이고. 허나 나름대로 내가 처한 입장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에 오르고자 열심히 일했다 자부한다. 철학함에 있어 실제 내 깜냥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아직 진행형이기에 더 두고 볼 일이나 칸트나 헤겔이 걸었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을 게다.
알프스 산행이든 정신 속 산행이든 내 깜냥대로 움직인다. 근데 사실 이 말은 결과적으로 내 뱉는 소리다. 메스너나 캄머란더 내지는 칸트나 헤겔에 비해 내 깜냥이 좁쌀만하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건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 깜냥 가늠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이런 비교없이 가늠하기는 더욱 어렵고. 더군다나 깜냥이란 게 숫자나 선으로 명확한 양이나 범위로 한정되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이전엔 알지 못했으나 새로운 경험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깜냥을 높일 수 있으니 말이다. 알프스 산행에서 한 때 암벽 밑에서 이를 타고 오르자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던 그 암벽타기를 경험을 쌓은 뒤 다시 해보니 최소한 그 떨림이 없어지는 경험을 했다. 내 깜냥이 한 웅큼 높아졌다고나 할까. 정신 속 산행에서 한 때 곧장 오르기가 내게 너무 어려워 보여 빙 둘러 오른 뒤 아래를 쳐다보니 내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 어떠한 경로를 통해 곧장 오를 수 있는지 뚜렷히 볼 수 있었다. 한 웅큼 두 웅큼씩 자신의 새로운 깜냥을 찾고 키우며 다지는 모습, 이게 삶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