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

서동철 2010. 3. 24. 07:19


설탕밥

어렸을 때 치과의사가 내게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자기와 평생 친구가 될 소지를 다분히 갖고 있다고. 그만큼 이빨이 나쁘다는 말이었다. 이는 허나 이빨을 잘 닦지 않아 그렇다기 보다는 – 잘 닦은 편은 사실 아니었지만 – 오히려 그 때 내 즐겨 먹던 음식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름하여 설탕밥, 내지는 간장밥이 그것이다. 셋방살이에 찬거리 살 돈이 없어 밥상 위가 허전할 수 밖에 없었을 때 성질 고약한 아이의 반찬투정을 두려워하셨던 내 외할머니께서는 맨밥에 설탕과 간장을 비벼 내게 주셨던 게다. 짭짜름하고 달기도 했던 그 기똥찬 맛에 나는 반찬투정 부릴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 여하튼 꽤나 자주 이런 식으로 포식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니 그 젊은 치과의사의 말이 연상되며 가끔씩 악몽으로 자신의 자태를 내 눈 앞에 띄우곤 한다. 


물밥

특히 여름에, 후덥지근한 날씨에 웬만한 음식들, 그 잘 나가던 설탕밥조차 구미에 당기지 않았던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억압했던 외부적 강요를 이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밥 한 그릇을 비워야만 했을 때 나는 밥을 즐겨 물말아 먹었다. 물에 말아버린 밥은 목구멍 넘어갈 때 참으로 수월했고, 밥그릇 바닥을 일일히 박박 긁을 필요가 없었으니 매우 실용적인 먹거리였다. 나아가 설겆이하기에도 무척 편했으리라 자신만만하다. 

물말은 밥이 위에 들어가면 소화액 분비에 지장이 있다는 소리 역시 간간이 들었다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휘파람을 불어대곤 했었다. 


밥알 세톨

어렸을 때 겨울 농한기에 한번씩은 시골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하루는 아랫집 할아버지와 어째 우연히 한 밥상에서 식사를 했다. 통상은 아이들과 엄마나 당숙모들 드시는 밥상에서 먹곤 했는데 그 날은 재수가 무지 없었던 게다. 아니나 달라, 식사를 끝내고 숟가락을 밥상위에 가지런히 놓자마자 할아버지께서 내게 호통을 치셨다. 밥알 세톨을 밥그릇에 남겼다고 역정을 내셨던 게다. 도시의 풍운아였던 나는 무슨 소리인지, 왜 그게 그리 나쁜 일인지 당췌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국어 산수 점수는 항상 수였지만. 할아버지 말씀이, 니 이 눔 니 당숙이 농사 지으며 쌀 한톨 얻느라 피땀 흘리며 얼마나 고생하는가 그 반에 반만큼이라도 알아도 그 따위 서투른 낭비는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내 밥 먹고 밥그릇에 숭늉을 받아 천천히 돌려가며 싹쓸이 먹는 버릇은 그 때부터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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