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

철학자와 돈

서동철 2010. 3. 23. 03:59

철학과 돈은 물과 기름이다. 돈많은 철학자란 그래 다름 아닌 네모난 삼각형에 다름없다 여긴다. 철학사를 보면 이러한 모습을 심심찮게 있다.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증명이 되는 셈이다. 니이체가 말한 결혼한 철학자는 코메디란 말보다 진지하게 들리는 말이다. 결혼하고 돈많은 철학자란 그러니까 넌센스 중의 넌센스다


라인홀드라는 철학자가 있다. 칸트의 제자로 어쩌면 독일고전철학사에서 불행하게도 자기의 본래가치를 가장 불공평히 평가받는 사람이라고도 있다. 당시 그가 기여한 철학의 내적 성숙도에 비교해 후에 그가 받은 그리고 지금 받고 있는 대우는 너무 보잘 없다는 말이다. 그가 있었기에 피히테의 철학이 탄탄할 있었음만을 상기해 봐도 있다. 그가 있었기에 칸트의 철학이 피히테의 철학으로 넘어갈 있었던 게다. 


라인홀드는 예나대학 철학교수였는데, 바로 피히테의 전임자였다. 그러니까 라인홀드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물론 괴테와 쉴러의 동의도 필요했지만, 1794 당시 피히테가 예나 대학 교수직을 맡기는 불가능했었다. 가난에 찌들어 살아야 했던 피히테의 처지로 봐서 이건 크나 행운이었다. 라인홀드가 자리를 비운 사실 말이다. 근데 그는 자리를 마다했을까?

라인홀드는 예나대학을 떠나 북독의 킬대학으로 이전을 했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때문이었다. 보수가 킬대학이 예나대학보다 훨씬 셌다 한다. 그래서였단다. 허나 이는 후에 라인홀드한테는 치명적인 실수로 드러나고 말았다. 보수가 센만큼 물가가 예나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실질임금은 오히려 예나대학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덧붙여 당시 독일 정신계의 중심지였던 예나였고 보면 그에게 있어 킬로의 이사는 얼마나 손실이었는지 미루어 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는 장사가 아니었던 게다. 피히테는 전임자 라인홀드의 이러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아둔함에 힘입어 예나대학에서 강의를  통해 자신의 철학체계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게 당시 독일낭만주의의 탄생과 성숙에 엄청 영향력을 미쳤고, 나아가 이후 진행된 독일고전철학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러고 보면 라인홀드의 이전은 철학적 운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철학자가 밝히면 이런 형편없는 꼴이 되버린다. 얼추 비슷한 모양새로 루소는 돈과 문명화와의 반비례적 관계를 역설했다. 양반은 인류의 문명화는 근본적으로 퇴폐의 역사라 외치며 이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바로 사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남을 헤치면서까지 자신의 물적 자산을 늘리겠다는 욕심에 인류의 망조를 엿보았던 게다. 이러한 추세를 박차고 나가 오래 우리 인류가 꾸렸던 천진난만한 소공동체의 생활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바로 그의 유명한 문구자연으로 돌아가라!’ 참뜻이다. 주말에 산천초목에 들어가 맘껏 놀아라 하는 소리가 아닌 게다. 


결국 내가 돈없이 사는 모습은 어쩌면 운명의 힘이 벌리는 한마당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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