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학을 공부하시는 님,
벤야민이 자신의 짧은 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들려 준 문구 '정치의 예술화, 예술의 정치화'를 현대화 하겠다는 말씀, 제 마음을 훈훈히 달래 주네요.
이에 준해 감히 다음의 두 말씀 드립니다:
하나
통상적인 번역 '정치의 예술화'에 문제가 있다 봅니다. 우선 벤야민 또한 이를 님도 주지하시다시피 Aesthetisierung, 즉 '미화'라 표현했지요. 허나 더 큰 문제는 이를 '예술화'라고 번역하는 경우 이 '예술화'가 여기서는 분명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는 바, 예술 그 자체도 이에 휩쓸려 벤야민이 예술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나 하는 애꿎은 의심을 품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더군다나 벤야민이 보들레르나 카프카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연구한 흔적을 보면 그 의심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마땅합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우리가 이를 '미화', 즉 '미'라는 개념을 도구로 번역하는 경우 미사여구라는 말에서 엿보듯 겉포장 씌우기 식으로 꾸미며 속 알맹이를 감춘다는 뜻의 부정적 의미를 통해 피할 수 있는 불필요한 오해를 '예술화'라는 번역이 행여 자아낼 위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사실 한국 번역본을 갖고 있지 않아 자세한 조사는 해 보지 않았음에 송구스런 마음 품습니다만, 행여 위의 통상적인 번역이 '정치'와 '예술'을 단순히 상호 앞뒤로 바꾸어가며 해대는 표현이 자아냄직한 특수효과를 염두에 두었다면 생각이 너무 짧지 않았나 여깁니다.
둘
이러한 벤야민을 현대화 하시겠다는 말씀 또한 저를 고무 시킵니다.
단지 이에 몇몇 작품들을 예로 드시고 마셨음에 쪼께 아쉬움이 남아 감히 말씀드립니다. 사실 벤야민은 위의 명제 '정치의 미화, 예술의 정치화'를 그 문제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주제로는 내세우지 않았죠. 오히려 그가 직접 썼듯, NACHWORT, 즉 후기로, 다시 말해 본문을 다 쓰고 나중에 첨가했을 따름입니다. 그 논문의 결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뒤집어 말씀드리면, 이 논문의 주제 - 사진, 필름등의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예술의 양적인 면이 변했으니 그 질적인 면 또한 변했음을 인지하자 -를 알아야 우리가 파시즘적 '정치의 미화'에 대항해 공산주의적 '예술의 정치화'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벤야민의 주장입니다.
그럼 지금 여기의 우리는 과연 이러한 벤야민을 어찌 현대화 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벤야민을 읽고 그에 대해 말을 섞는 근본 이유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우리 나름대로의 답을 구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네요.
저라면 서둘러 이리 답을 하렵니다:
이러한 일련의 질문에 답을 하려면, 하고자 한다면 지금의 예술에 나타남직 하는 벤야민 식 변화에 대한 공부를 먼저 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컨대 싸이버 예술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공부입니다. 벤야민 시대에 사진기술이 예술의 질을 변화 시켰듯 지금 여기 우리의 시대에는 어쩌면 이 컴퓨터기술이 예술의 질을 새로이 변화시키지 않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미 변화시켰을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이를 우선 알아야, 벤야민의 뜻에 따라, 필요한 경우 지금 여기 우리 예술의 정치화를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라면 짜장 벤야민은 아직 우리들의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실상 지난 이라크 전쟁에서 CNN의 Embedding이 보여 주었던 허구, 즉 삼차원의 리얼리티가 이차원의 화면이라는 어줍잖은 판톰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며 전쟁의 내지는 '정치의 미화'는 이렇듯 한 천박한 장사꾼과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정부와 손을 잡고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항하는 지금 여기 우리의 ‘예술의 정치화’는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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