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ttgenstein이 1930년에 던진 말이다:
"자기가 관찰되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을 그의 극히 평범한 일상적 생활에서 지켜보는 것만큼 묘한 것도 없다. 연극을 생각해 보자. 막이 올라간 뒤 한 사람이 자기 방에서 서성거림을 본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자리에 앉는 모습 등등을 지켜 봄과 같이 우리는 평상시와는 전혀 달리 갑자기 뭇 사람을 밖으로부터 지켜보는 듯하다; 우리가 만약 일종의 한 일대기의 한 장을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본다면, - 이는 섬뜩하고 동시에 대단히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으리라. 한 작가가 무대 위에서 연기나 말을 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 허나 바로 그러한 것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음에도 불구 하등의 그런 인상을 남기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는 그 삶을 바로 >>그<< 시각으로 보지 않는 게다."
(번역: 서동철)
II.
예를 들어 우리가 Ken Loach의 Kes를 영화관에서 보았다 가정해 본다.
Loach가 아무리 기록 영화에 근접할 정도의 사실주의에 입각해 자신의 영화를 만들었다 해도 영화 속의 줄거리는 최소한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사실과 차이를 둘 수 밖에 없다:
첫째로 Loach는 사실이라는 무궁무진한 예술의 소재 덩어리에서 몇몇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장면을 선택 취사한다. 선택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돋보이고자 하며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바에 대한 무관심을 표하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 그는 예컨대 회사원들의 생활 공간보다 (실직)노동자들의 그것을 카메라에 담았는가 말이다. 이러한 선택이 전제하는 잣대가 어쩌면 우리의 사실에 대한 시각을 '왜곡'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짜장 배제하기 힘들다.
둘째로는 이렇게 선택한 소재들을 영화라는 예술의 한 형식을 통해 구성한다는 데 사실 이 사실대로 전달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예컨대 빌리라는 소년 주인공이 새를 길들이는 것과 빌리의 외곬적인 학교 생활을 연결짓고자 하는 구성적 의도 말이다. 이에 분명 Loach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특별 메시지를 읽을 수 있지 않는가? Loach는 어쩌면 이러한 시각으로 우리 주변의 사실을 바라볼 수도, 아니 어쩌면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택된 사실을 구성된 형식 속에서 바라보는 그러한 시각 말이다.
어쨌든 최소한 이 두 가지 이유로 우리가 영화관에 보는 Kes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가 아니다. 예술의 세계다. 덧붙여 새로운 세계에 맞닥뜨린 우리 또한 이전의 사실로서의 우리가 더 이상 아니다. 영화관에 앉아 Kes라는 작품을 즐기는 우리는 일상 생활이라는 사실에서 품고 있었던 걱정, 공포, 기쁨 등등의 내적 감정상의 움직임을 버리고 우리 속의 기저 바탕에 흐르는 느낌의 세계를 대하고 있는 예술 작품에 걸맞게 재편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전의 그 사실로서의 우리가 더 이상 아니다. 영화관이라는 한 예술 작품과의 만남의 장소에서는 말이다. 따라서 작품의 가치를 작품의 내용이 사실과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잣대로 삼는 행위는 예술적 행위가 아니다. 내가 Kes라는 예술 작품에 기대하는 바 또한 이러한 부합이 아니다. 그럼 뭐이냐?
III.
동일 맥락에서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허나 보고난 후에 등장한다. 일반 헐리우드의 소위 액숀 영화나 007 영화처럼 보고나자마자 맥주 한 잔 내지는 차 한 잔과 더불어 쉴 틈도 없이 잊어버리는 그런 영화류에는 Kes는 일단 속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우리 속에 건더기를 남겨 놓는다. 그것도 꽤나 굵직한 건더기, 즉 왕건이를 말이다. 이 왕건이를 우리는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씹는다, 아니 곱씹을 수 밖에 없다.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우리가 가만 있지를 않는다. 이를 통해 무엇이 발생하는가?
자유다. 내 의식의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어두운 면의 그 무엇이 Kes라는 예술 작품을 통해, 즉 주인공 소년 브래들리의 연기를 통해, 또한 동시에 Kes라 불리우는 새가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앎을 통해 밝음으로 진입함에 따라 나는 나 자신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된 셈이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우리 모두의 공통된 근본적 앎에 대한 욕구가 이로써 한 웅큼이나마 채워진다고 할까? 이를 향한 내 눈길의 앞을 가로막았던 장막의 한쪽 구석에 틈을 냄으로써 막혔던 숨이 트이는 듯한 시원한 해방감을 맛본다고나 할까? 나아가 이러한 의미에서 더 자유스러워짐에 따라 내 스스로부터의 소외라는 줄을 단축한 셈이 되니 이는 외로움의 감소를 뜻한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근본적, 따라서 피할 수 없는 그 외로움 말이다. 이에 대항해 나는 예술을 통해 나 자신을 한 웅큼씩 새로 발견하는 셈이다. 나 자신을 그만큼 한 웅큼씩 새로 자유스럽게 만드는 셈이다. 그러니까 덜 외로와진다.
성장이다. 나 자신에 대한 앎이 크고 깊어짐에 따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내 주변 세계에 대한 내적 모습 또한 알차게 되는 그런 성장을 맛보는 셈이다. 내 의식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의 뭉치가 조금씩 조금씩 밝혀짐으로써 맛보는 해방감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예술이 이 어두운 구석에 인공의 빛을 비추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고, 오히려 어쩌면 촉매적 작용을 했을 뿐, 빛은 내 스스로 비추었다, 아니 예술이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내 자신을 다시 한번 비추어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이와 동시에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에의 접근 또한 그만큼 가까워졌음을 인지한다. 물론 오류의 그물을 피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접근이라는 긴 여정에 한 싱싱한 획을 그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한 웅큼의 성장을 예술은 내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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