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cault는 한 사회 내에서의 권력, 진리 그리고 지식의 상관 관계를 - 서구 사회에서 -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 설명할 수 있다 주장한다. 이 두 가지는 그러니까 이러한 요소들이 해당 사회 내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형성해 나가는 방법을 가리킨다.
하나, ars erotica - 性의 예술
여기에서는 진리가 섹스로부터 직접 도출 된다. 경험으로 축적되고 그 질에 맞추어 분석되어지며, 또하 이에 따른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을 추적한다.
이러한 지식은 비밀스런 경로를 통해 전문가에 의해서 몇몇 선발된 출중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던 바, 이들은 이를 다시금 자신의 섹스에 적용함으로써 이에 대한 제반 지식을 더욱 집중 강화하고 완전화 시켰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서구 문명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몇 백년이래 알지 못한다.
둘, 섹스학의 방법 - 性의 학문
서구 문명에 퍼져 있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분석되어지는 것은 섹스의 쾌감이라기 보다는 이에 대한 욕구다. 이에 따른 전문가의 과제는 위에서처럼 비결을 직접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묻거나 들으며 해석하는데 있다.
이러한 과정의 목표는 당연 성적 쾌감의 증가라기 보다는 성적 주체의 변화, 즉 용서나 화해 내지는 해방이 된다.
물론 Foucault는 이러한 예술과 학문의 경계를 명확히 그을 수는 없다 고백한다. 서로 간의 영역이 상당 부분 겹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 사회 내지는 공동체의 성격을 이러한 기준에 따라 명확히 구분짓기는 힘들다 한다.
어쨌든 Foucault는 성의 학문의 탄생을 연구함으로써 사회 내지는 공동체 내의 권력 구조를 분석할 수 있다 호언장담한다. 바로 이 점이 Foucault의 연구 목적이다. 왜 서구 역사에서 性生活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억압당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 말이다.
여기서 또한 짧게나마 Foucault의 방법론을 엿볼 수 있다: 성의 학문이라는 부정적 영역을 거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속에 들어가 파헤쳐 보면 어딘가에 긍정적인 구석이 발견 되매 이를 찾아 만천하에 알리자는 속셈이다.
그는 이러한 방법론의 예로서 여성운동을 든다. '너희들 여성들은 섹스 밖에 없다'는 구태의연한 종래의 유럽적 선언에 대항해 여성운동가들은 이를 부정하려 애쓰기 보다는 오히려 '좋다, 우리들은 그렇다, 허나 한번 그 내용을 다시 한번 파헤쳐 보자' 한 다음 그 속에서 긍정적인 면을 밝혀냈다는 Foucault의 주장이다.
서구에서 19 세기 말, 20 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러한 타부가 깨지기 시작했다 한다.
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의 순간이다 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196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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