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

문화적 추론

서동철 2010. 12. 16. 17:52

상고사 공부가 어려운 이유로서 돈버는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일단 차치하고 보면 우선 떠오르는 점은 자료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갖고 있던 자료들을 조선시대 초에는 금서목록으로 묶어버려 불태워버렸지 않나, 이후 그나마 잔존하던 고서들을 일제시대 일본사람들이 도둑질 해가 지금 천황도서실에 숨겨두고 있다 한다. 덧붙여 지금도 접할 있는 상고사를 다루는 두어권의 책들은 한국의 소위 강단사학계에서 위서라며 백안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학계를 주름잡는 무리들이 책들의 내용이 자기네들이 일제시대 배웠던 내용과 다르며 또한 고증이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고증, 사실 이게 문제긴 문제다. 서양사에서도 신화로만 알려졌던 트로이라는 나라가 고고학적 발굴에 힘입어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새로 자리매김 당했듯 문자로 기록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대의 역사는 고고학과 함께 일하지 않고선 역사성을 설득시키기가 사뭇 힘들다. 그런데 우리 겨레의 선배들은 지금 중국의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었다. 고조선이 그랬으며 이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던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작업은 중국정부와의 협조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난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 이후 고구려사에 대해 높아진 관심에 힘입어 이러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으나 중국정부의 협조를 여적 얻어낼 없다 한다. 협조는 커녕 지역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능에 대한 접근을 아예 막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취할 있는 상고사 연구의 가능한 방법론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당시의 정신문화를 통해 당시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추론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에도 적지 않은 제약들이 설치고 있다만 최소한 궁여지책으로선 손색이 없다 여긴다. 예를 들어 우리 겨레가 중국으로부터 불교와 유교를 어떠한 모습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세계적 사상들과 우리 겨레와의 오래된 인연을 추론해 얻을 있다.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 삼국이 유교를 쉽게 받아들였고 불교는 오랜 진통 끝에야 공인된 종교로서 인정을 했음은 공통된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둘을 받아들이기 전에 팽배했던 우리 고유의 문화적 성격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교의 가르침은 원광법사가 만들었다 하는 신라 화랑을 위한 세속오계에서도 엿볼 있듯 이미 우리 겨레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체화한 사상인 반면 불교는 우리에게 이질적인 문화였던 게다. 신라에선 이차돈이 불교의 공인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을 정도다. 유교가 문화사적으로 중국계 기마종족의 나라인 은나라에서 태동한 지식인 무리였던 유가에서 원천을 찾을 있으니 계통은 약간 다르나 같은 기마종족이었던 고조선의 고유사상과 함께하는 내용들이 적지 않으리라는 추론이 어렵지 않으며 더군다나 은나라 멸망 이후 주나라를 피해 산동반도 쪽으로 피신한 기자가 바로 이웃에 살던 우리의 직계 조상 기마종족에게 전해 유가적 전통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있다. 불교는 반면 이질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욕보고 있다가 끝내는 인정이 되고 심지어 원효와 같은 동양 최대의 선승을 낳는 문화적 쾌거를 이룩했으나, 백제에선 예컨대 현세구제적인 미륵불교를 당시 통치권의 세력 보존을 위해 이용 내지는 악용하는 역사적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우리 고유의 전통과 다른 사상을 통해야 전까지의 분권적 지배체제를 벗어나 새롭게 혼자 우뚝 서는 권력집중적 지배체제를 이룩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 후기의 왕권은 실제 자신들의 권력 보존을 위해 백제의 유구한 사냥 전통 등을 헌신짝 버리듯 했으며 이러한 무지몽매는 곧이어 나라의 멸망으로 치달을 밖에 없었던 게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아울러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외래문화를 받아들임에 있어 의미심장한 경고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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