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추 10 시간 이상의 마라톤산행에 몸이 꽤 많이 망가져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씽씽 지나치며 마을 쪽으로 달리는 몇몇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터덜터덜 걷는데 갑자기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일반차량 통행이 금지된 지역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거의 즉흥적으로 손을 들어 태워주기를 부탁했다. 밑에 마을 샤르닛쯔에 사는 한 상냥한 여자가 웃음으로 반겨주며 나를 역까지 태워주었다. 계속 걸었다면 잡을 수 없었던 19시 27분 뮌헨행 기차를 한 시간 이상 기다리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허나 시간보다는 무엇보다도 고된 산행이 자아낸 몸의 흐드러짐 때문에 그 여자의 도움은 짜장 꿀맛이었다. 역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지난 산행을 되돌아보는 사치를 즐겼다.
호헤 글라이르쉬, 인스부르크로 이어지는 글라이르쉬-할탈 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우뚝 솟아 있는 2492 미터 높이의 산이다. 티롤 북부에 놓여 있는 카르벤델 알프스의 중심을 이루는 맥이다. 독일의 밋텐발드 다음 역인 오스트리아의 샤르닛쯔 역에서 내려 오르는데, 빨간색 표시가 되어 있는 오름길을 택하면 길긴 하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산행이다. 허나 되도록이면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고자 했고, 더군다나 날씨가 산행에 딱 어울리는 날이었기에 몰릴지도 모를 인파가 두려워 길표시가 없는 길을 골랐다. 서쪽 끄트머리에 올라 산등성을 타고 달리며 꼭대기에 오른 후 표시가 되어 있는 남쪽길로 내려가며 이 산을 한바퀴 돈다는 계획이었다. 우선 숲속을 뚫어야 했는데, 제대로 된 길이 없어 대강의 방향감각에 따라 가파른 경사를 올랐다. 느낌이 좋았기에 맞겠지 하는 마음으로 한참 오르니 돌산이 나타나더만 야생산양들 서너마리가 능선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꽤나 부러웠다. 한 시간 이상 더 올라야 다다를 산등성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햇볕은 또 왜 이리 뜨겁냐.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다 신선놀음 하는 듯 꾸물대는 산양들이 얄미워 소리를 몇 번 버럭 질렀다. 자식들, 그러니 잠시 나를 쳐다보며 미안해 하더만. 사람이라곤 나 혼자 뿐이었다. 오르는 길에서 뿐만 아니라 나중에 꼭대기, 그리고 내려가는 길 끝까지 오로지 나 혼자였다. 너무 신났다. 허나 산행 자체는 내 다시 하라면 머뭇거릴 정도로 힘들었다. 내 체력의 한계를 보는 듯한 힘든 산행이었다. 남한테 권하고픈 산행은 아니었다.
역 앞 음식점에서 시원한 '어두운 흰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한 금발의 젊은이가 다가오더만 함께 앉아도 되겠냐 묻길래 '기꺼이'라 답했다. 인스부르크에 사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 자신을 소개하며 오늘 인스부르크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샤르닛쯔로 넘어오는 산중산책을 즐겼단다. 산행 중 혼자있음이 안겨주는 쾌감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잔을 부딪치기도 했는데,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뮌헨이라 했더만 또 묻길래 한국, 또 던진 물음에 남한이라 답해 주었다. 이 친구 왈, 몇년 전 캄보챠에 얼추 육개월 머물 기회가 있었다며 그 때 남한사람들 또한 몇명 알게 되었단다. 전부 선교사로 가족들과 함께 와 있더라고. 근데 하루는 그들한테 선교 당했다는 한 캄보챠인이 자기한테 오더만 하는 말이 이 다음에 부자되어 땅을 사서 농사를 짓겠다는 포부를 밝히더란다. 그래 부자된다는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왔냐 물었더만 한 남한 선교사가 기독교 믿으면 부자된다고 자신있게 말하더라고. 그래 나와 함께 또 한번 웃었다. 내 웃음이야 쪼께 씁쓰름하긴 했다만. 이명박 찍은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돈벌게 해준다 해서였다는 소문이 언뜻 떠올랐으니 말이다. 믿음이 아니라 돈이 종교를 바탕지으며 평등이 아니라 돈이 정치를 뒤흔드는 나라가 대한민국인가 그려보니 섬짓했다.
근데 그 젊은 친구 인상이 참 좋았다. 웃는 모습도 서글서글하니 말할 때 침도 튀기지 않고 또렷또렷, 허나 무엇보다도 알프스 때문에 유럽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내 말에 충분히 이해하고 자기 또한 그렇다며 맞장구 치는 모습이 넘 맘에 들었다. 다음에 산행 중 또 한번 마주친다면 내 사윗감으로 삼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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