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편지

첫번째 편지 – 떠남

서동철 2010. 3. 7. 21:11

산에 오름은 그 목적이 정상정복도 아니요 더군다나 다시 내려가기 위함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오름 그 자체에 목적이 이미 단단히 박혀 있지 싶습니다. 오를 때나 정상에 발 디디는 순간, 나아가 다시 산을 내려가는 매 순간 순간에서 전체 산행의 목적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렇듯 매 순간을 그 나름대로의 멋과 맛에 따라 즐기는 게지요. 오르며 정상을 바라볼 때, 정상에서 온누리를 내려 볼 때 그리고 다시 내려가며 처음 올랐던 곳으로 돌아가는 매 순간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산행을 이러한 여러 다름들로 채워진 묶음으로서 다시 한번 곱씹으며 집으로 향하는 제 마음에서 언제나 포근함을 느끼곤 하지요.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맘 때쯤이면 거의 예외없이 독일에 첫발을 내디뎠을 적 모습이 떠오릅니다. 강산이 두 번씩이나 변하고도 남을 정도로 긴 세월이 그 동안 흘렀지만 이즈음 감도는 냄새를 그 때 역시 맡았지 않나 싶어요. 촉촉한 땅 위에 살짝 젖은 낙엽들이 찬 공기를 뚫고 풍기는 냄새는 나름대로 감칠 맛이 있지요. 


독일 땅에서 철학을 배우고자 서양 쪽으로 향하며 난생 처음 겪은 비행기 여행은 첫사랑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달콤하긴 했습니다. 특히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구름들이 무척 인상적이더군요. 솜사탕의 바다 위를 떠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누가 그런던데, 그런 엇비슷한 황홀감에 감싸여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 만큼의 선명함으로 아직까지 놓지 못하는 모습들 중 하나는 그 때 그 순간 그 구름에 비추어 바라볼 수 있었던 제 얼굴이었지요. 불현듯 눈에 띄었던 그 모습에서 제게 미지수였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는 마당에 지금까지 몸 담고 있었던 옛 세계에서의 이런 저런 모습들이 아른거렸습니다. 어쩌면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죠. 넘어가더라도 제대로 알고나 넘어가자 뭐 그런 속셈이었는지도 모르고요. 어릴 때, 중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 그리고 군 시절 등등에서의 단편적인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더군요.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 삼 학년 때쯤이던가 전공 학과와는 다른 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기로 굳게 결심할 때의 그 혼란이 다시금 저를 자극했었다 기억합니다. 독일 뮌헨으로 철학을 공부하러 대장정을 하는 판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연상이었을 겝니다. 돈 실컷 벌어 모두 함께 잘 살고 잘 먹자 외쳤던 물질적 욕심의 시기를 뒤로 하고 이를 밀어내는 철학함의 힘에 눌렸던 그 때 그 시절의 달콤한 기억에 잠시 잠길 수 있었죠. 돈을 통해서 보다는 철학함이라는 정신적 행동에 힘입어 보다 더 좋은 일을 세상에 펼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겝니다. 


물론 이러한 달콤한 태어남은 동시에 씁쓰름함을 동반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의 엄청난 반대 말입니다. 철학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 어찌 되었든 밥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냐, 그게 무에 소용이 있느냐 등등의 질책이 주를 이루었죠. 하다 못해 미아리 고개에 그 수많은 '철학자'들을 보지 못하느냐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이 중 가장 속을 상하게 했던 질타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계속 걷기에 자신이 없으니 한번 호기심으로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찾는게 아니냐는 힐책이었어요. 철학에 대한 나의 진심어린 열정을 완전 무시하는,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의 안경을 통해 나의 진정성을 바라보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에 공부를 마친 후 철학 교수가 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만천하에 공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 끊이지 않는 질책과 회유의 시도가 이어졌는데, 그래도 이 와중에서 내게 제일 먼저 이해의 손길을 뻗치고 나아가 그 미지의 새로운 길 위에 선 나에게 뒷받침을 약속한 분이 계셨죠: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독일에서 유학을 할 경우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셨고, 무엇보다도 제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니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확신하는 길을 계속 걸으라는 고마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어머니의 품이 그 뒤 대학을 졸업하고 치룬 군대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적지 않이 도움을 주었지요. 제대 후에 곧바로 독일로 철학을 공부하러 간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으니 말이죠. 


그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대한민국의 정치 내지는 사회적 실상 또한 저의 어려운 결정을 내림에 한 몫을 차지했었습니다. 특히 그 때의 군사독재 정부에 대항하며 적지 않은 젊은 생명들을 앗아갔던 분신자살의 모습에 저 역시 일상의 몸가짐을 고집하기가 힘들었지요. 허나 동시에 사뭇 궁금하더군요 – 어떠한 이유로 이들이 그러한 과격한 행동을 했는가 말입니다. 도데체 무엇을 자신들의 의식 속에 품었기에 그런 자살을 유발했으며 스스로 정당화시킬 수 있었는가 말입니다. 이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을 모으면 모을수록 다가오는 모습이 바로 독일철학이더군요. 칸트로 부터 시작해서 헤겔, 그리고 맑스로 이어지는 철학함 말입니다. 이에 덧붙여 한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자극하는 니체 역시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요. 어쨌든 그 당시 제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한국의 사회정치적 모습들을 어쩌면 독일철학을 공부함으로써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게 또 나 자신을 좀 더 제대로 알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닐까 여겼고오. 


독일 땅에 발을 딛고 맡을 수 있었던 냄새는, 지금도 어렴풋이나마 그 때의 인상이 기억에 남아있는데, 한 마디로 이색적이었습니다. 이 곳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아울러 여자들이 풍기는 화장품 냄새는 한국에서 맡았던 것과는 또 다르더군요. 어쨌든 그 당시의 제게는 이러한 이색적임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선함으로 제 살갗에 와닿았다고 기억합니다. 과거의 묵은 때 위에 미래의 보자기를 씌웠다고나 할까요? 여하튼 이러한 설레임으로 이어졌던 현재의 시간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