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접근
이미 밝혔듯 독일에서 벌어진 헤겔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논리의 학’을 헤겔공부의 교과서로 삼고 씨름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도 어려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독일어의 어색함 또한 한 몫 담당했던 듯하다. 예를 들어 그 책 시작부분의 소위 ‘있음의 논리’에서 쓰이는 말 ‘있음’에 대한 이해 말이다. 원어로 Sein, 서양철학을 주름잡았고 여적 휘젓고 있는 철학의 핵심개념인데, 헤겔 또한 이에 자기철학의 이해에 있어 상당한 비중을 매기고 있다. 우리말로는 통상 ‘존재’로 번역하는 모습인데, 나는 ‘있음’을 선호한다. 사르트르의 주저가 우리말로 ‘존재와 무’로 번역되어 있는 바,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굳이 그리하자면 ‘유와 무’로 해야 대립각이 제대로 세워질 수 있지 않을까? ‘존재’를 허나 고집한다면 ‘존재와 비존재’라 하던지. 단지 이럴 경우 ‘비존재’와 ‘무’와의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일부러 보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게다. 헤겔은 심지어 ‘있음의 논리’ 해설에서 ‘없음(Nichts)’에 해당하는 말로 ‘비존재(Nichtsein)’라는 표현은 곤란하다고 분명히 밝힌다. 어떠한 것과 관계를 맺기 이전에 원초적으로 생각되어져야 할 ‘없음’이 ‘비존재’로 대체될 경우 ‘존재’와의 관계 에 종속된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 아예 처음부터 ‘있음’으로 옮김이 속 편하지 않을까 싶다.
단지 ‘Sein’에는 ‘있음’의 뜻 외에 또 다른 뜻이 함축되어 있다: copula, 즉 연결사의 뜻이다. 예컨대 ‘서동철은 철학자이다’에서처럼 우리말로 굳이 옮긴다면 ‘~이다’가 된다. 즉 한 문장에서 주어와 서술어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떠맡는 게다. 이게 철학사에서 절대 무시하지 못할 큰 뜻을 품는 이유는 한 문장으로 표현되는 일정한 판단에서 연결사가 주어와 서술어를 연결하는 모습에서 그 판단을 직접 내리는 주체의 행동을 엿보고자 하는 철학적 의도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위 문장 ‘서동철은 철학자이다’라는 문장을 말하는 사람의 판단적 행동이 바로 연결사 ‘~이다’에 담겨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이 두 가지 상이한 뜻이 거의 같은 비중으로 등장해 서로를 뒷받침하며 서양의 철학판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현대까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피히테철학 제일명제도 그렇고 헤겔의 ‘있음의 논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여하튼 몇몇 철학적 중요개념들이 품고 있는 넓고 깊은 뜻에 정신을 차리기가 만만치 않아던 그 때였다. 헤겔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비지땀 흘리며 욕봤던 그 시절, 매일 저녁 샤워하며 머리털 빠지는 양이 두려울 정도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율부린너가 징그런 웃음을 보내곤 했다. 그래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포기란 내 사전에 없음은 자명하니 어찌되었든 앞으로 나아가야겠건만, 문제는 어떻게였다. 헌데, 궁하면 통한다고, 아니 사실은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아이큐 150에 – 아무도 쯩을 요구하지 않을 게 뻔하니 뻥 질러본다 – 남들로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만) 듣고 자란 나이거늘 어찌 일개 철학자 헤겔한테 내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하며 버티었다. 그래 떠오른 생각이, 좋다, 그럼 니가 걸어온 길을 나 역시 그대로 한번 밟아보련다, 물론 그대로는 시대적 차이로 인해 불가능함을 알고 있으나 니가 읽고 공부하고 했던 칸트, 야코비, 라인홀드, 피히테 등등을 내 꼼꼼히 공부할 것이며 덧붙여 너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눴던 휄덜린, 셸링의 철학 또한 내 씹어 보리라는 다짐이었다. 그런 연후 만약 니가 옳다면 나 역시 니가 도달한 경지에 닿을 것이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너와는 결국 다른 길을 밟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리라고 여겼다.
아직까지도 이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그와는 다른 길을 가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윤곽만큼은 보일듯 말듯 한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