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이야기

늙음 속의 젊음

서동철 2013. 12. 10. 02:02


- 허락하신다면 나이를 여쭙고 싶네요.
- 저보다 어리신 듯 한데요.
- 아닐껄요. 전 64입니다.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놀랍다, 예순넷에 이리 힘든 눈신발 산행을 가볍게 이루는 그 모습에 놀란 게다. 호흐게른 산 북쪽 능선을 타고 오르는데, 이 능선이 꽤 가파르다. 그래 여름산행조차 그리 쉽지 않은 길인데 겨울에 눈신발 산행을 타고 오르기는 웬만한 체력과 방향감각 없인 거의 불가능하다. 내겐 지난 겨울에 대강의 길을 자주 - 집에서 차타고 얼추 15분 달리면 산 어귀에 다다른다 - 눈에 익혔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다만.

지난 주마냥 오늘도 눈 위에 첫발자국을 찍어가며 올라야 하나 했는데, 어라, 누군가 눈신발 흔적을 남겼음에 반가왔다. 힘이 훨씬 덜 들기 때문이다.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기에 어제 흔적인가 했다. 그래 가끔씩 소리도 지르고 노래와 휘파람 불어대며 올랐다. 근데 한참 오르다 보니 앞에 누군가 오르고 있음을 눈치 챘다. 눈신발 흔적을 보니 나보다 훨씬 가벼운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여잔가? 여자 혼자 이 힘든 길을 밟고 있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능선 끄트머리에서 만나 쳐다 보니 진짜 여자였다. 대뜸 고맙다는 인사말을 건네며 잠시 쉬었다 내가 앞에 갈테니 좀 기다려라 했더만 아니란다, 지금까지마냥 자기가 앞에 가겠단다. 그러며 내게 이런 저런 말을 건넸다. 알프스 산 속에선 남녀노소 막론하고 통상 말을 놓는데 이 여잔 가만 보니 내게 존칭 쓰기를 고집하길래 나 역시 말을 놓을 수 없었다.

- 난 당신보다 열살 어립니다. 근데 그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좀 알려 주실 수 있는지요?

이년 전 자기 남편이 한님께 돌아가기 전까지 둘이 여기 저기 많이 다녔단다. 과부가 된 이후 산행에 집중적으로 눈길을 돌렸다고. 단지 때론 이리 힘든 산행을 즐기다 보니 자기 또래 친구들이 함께 할 수 없어 혼자 다닌단다. 근데 자기한테 역시 이 능선 오르기가 힘들어 혼자 이룰 수 있을까 의심하며 몇 번 되돌아갈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 노래소리를 들었다고. 자기 외에 누군가가 그 험한 지역에서 자기마냥 욕보고 있다는 사실이 심적으로 작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며 되려 나한테 고맙단다. 그 노래 참말로 잘 들었다고. 그래 함께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신중현의 봄비 한 곡조 뽑을 걸, 둘째 딸아이 부르는 독일 동요를 불렀으니 쪼께 후회스럽다.

어디서 왔냐 묻길래 남한서 왔다 하니 자기가 이전에 간호원으로 일했는데 그 때 간호원으로 일하는 몇몇 한국 여자들을 알고 지냈다고. 그래 인상이 좋단다. 내가 겪은 바로는 항상 좋지만은 않던데.

꼭대기에서 다시 만났다. 내 앞에 가던 그 여자는 정상길을 타고 오른 듯하고 나는 겨울산행에서 가능한 비탈 지름길을 타고 올랐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했다. 이 때도 이 양반 자기 장갑을 벗는 등 계곡에서 행하는 예를 보이길래 나 역시 어쩔 수 없었다. 내내 건강하시고 젊어 지내시기를 바란다는 인사와 함께 헤어진 뒤 산을 내려오며 이 사람의 해맑은 인상을 다시한번 곱씹어 봤다. 오랫만에 만끽한 파란 하늘이 더불어 무척 싱그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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