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유고집에 실려 있는 자그마한 풍자글이다. ‘팽이’라 일단 제목을 붙여 둔다. 번역은 되도록 직역에 가깝게 하고자 애썼다. 남을 위한 번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를 위한 번역이다. 카프카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끄적거렸다는 얘기다.
팽이
한 철학자가 항상 아이들 노는 데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아이가 팽이를 갖고 있으면 눈여겨 보았다. 팽이가 돌자마자 그 철학자는 팽이를 갖고자 쫓아갔다.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자기들의 장난감을 그로부터 멀리하고자 했는데, 그는 이에 별 상관하지 않았다. 돌고 있는 팽이를 갖고 있으면 그는 행복했으나 이는 허나 잠깐뿐이었으며 그는 팽이를 바닥에 던진 뒤 가버리곤 했다. 그는 모든 자그마한 사항들, 예컨대 돌고 있는 팽이를 인식함이 일반적인 사항들을 인식함에 충분하다고 여겼던 게다. 그래서 그는 큼지막한 문제들에 몰두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에게 비경제적으로 보였다. 가장 작은 사항이 실제 인식되었다면 그에겐 모든 사항들이 인식되었음이니 오로지 돌고 있는 팽이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언제나 팽이 돌리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으면 그는 희망을 품고 이루어지리라 여겼으며, 팽이가 돌면 팽이를 향해 쉼없이 달리는 동안 그에게 희망은 확실성을 띄었으나, 그 멍청한 나무조각을 손으로 잡는 순간 불쾌해졌고 그 때까지 들리지 않았던 아이들의 외침이 갑자기 귀에 들어왔으며 그를 내쫓았다. 그는 마치 서투른 채찍질에 도는 팽이마냥 비틀거렸다.
갈구했던 팽이가 잡히자마자 ‘멍청한 나무조각’으로 변한다. 동시에 그 철학자의 기분이 ‘불쾌’해지고 들리지 않았던 아이들 외침까지 들리는 변화가 일어난다. 팽이를 한갖된 장난감으로 보지 않고 자기가 찾는 그 무엇 - 철학자에겐 어쩌면 진리라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규정했는데, 결국 진리를 감싸고 있는 몸뚱이는 잡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진리 자체는 잡을 수 없는 모습이다. 바로 이 잡을 수 없음에 철학자는 비틀거리며 도망 가는데, 이러한 실패를 반복하는 뚝심을 엿볼 수 있다. 왜 실패할 수 밖에 없는지, 도데체 아이들 장난감 팽이가 어떠한 이유로 보편타당한 진리의 한 구체적 모습이라 여기는지 카프카는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자기가 이 풍자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비추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무언의 주장이라고도 보인다. 중요한 점은 잡히지 않는 것을 잡고자 하는 그 모순이며 또한 이 모순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철학자의 모습이다. 이를 카프카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투의 글로서가 아니라 상황을 서술하는 투로 말하자면 그린다. 철학자의 진리는 ‘팽이’일지 모르나 예술가의 진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철학자의 운명을 그리는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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