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형,
봄입니다. 꽃들이 기지개를 펴고 개구락지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생명 회복의 싱그러운 한 때입니다. 어린 새싹의 풋풋함에 고개를 숙이고 눈을 비벼야 함이 어찌보면 마땅한 이즈음이거늘 오늘은 항시 그렇지 않은 제 실제 일상생활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을 형 앞에 드러냅니다.
안녕하시지요?
지난 번 따님의 결혼식에서 뵙고 계절이 한번 바뀌었습니다. 그 날 식후 피로연에서 제가 형께 농담반 진담반 조로 새로 맺어짐과 새로 태어남의 덧없음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 기억하시는지요? 맺어지는 날 덧없음을 말씀드리자니 적잖이 계면쩍은 마음 숨기기 힘들었으나 실은 태어남에 대한 의미없음에 그 당시 제 자신이 눌려 있었음에 그 주원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삶 자체에 대한,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왜 살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던 때였지요. 아직까지도 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며칠 전에 제 어머니와 전화통화 하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세상에 태어남에 대한 의미없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당신과는 매일 오후 얼추 반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지요. 그래 서슴없이 이런 무례한 말씀을 드리는 어리석은 짓을 무심결에 저질렀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니나 달라, 당신께서 잠시 후 제게 던지시는 말씀이,
"내 니한테 미안해서 우짜꼬, 내 니를 이 세상에 낳아버렸으니 내사마 미안타"
순간 윽하는 아픔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씀으로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행여 삶의 그 의미없음이 진리라 하더라도 이를 나를 낳아주신 당신께 곧이 곧대로 들려드림은 진정 못난 짓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향해 그러한 미안한 마음을 품게 만든 그 사실 자체에서 저는 이미 불효를 저지른 셈입니다. 不孝.
제가 배우기론 오래 전에는 孝 이전에 내리사랑이 우선이었다 합니다. 그렇다고 중심에 그 방향성이 버티고 서있다는 말씀은 아니고요, 보다 더 근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어른이 어른답게 행동하면 아이들은 스스로 존경하며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들릴지 모를 이 소리를 확대 해석한다면 한 공동체 내에서 각자가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스스로에게 성실할 때 서로간의 조화스런 공동체적 생활이 꽃을 피운다는 말이지요. 이를 허나 거꾸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은 경우, 즉 각자가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않아 공동체 전체의 조화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 즉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갈등이 자율적인 조정으로 해소되지 못할 경우 도덕윤리적 강령이니 하는 외부적 강압 요소가 필요하게 되는 게지요. 이때 등장한 개념이 바로 孝입니다.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이리 보면 어른이 자기 본분을 지키지 않으니 아이들한테 윽박질러 어른을 일단 섬겨라 하는 압박입니다. 어찌 보면 급한대로 일단 사건을 무마시켜 보겠다는 속셈이기도 하지요. 전체를 위해 개인적 희생을 강요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보아 얼추 공자시대 이후로 이 개념에 대한 강조가 시작되었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미화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형이나 저 역시 무심결에 "요즘 아이들 말이야 버릇이..." 하는 말을 내뱉곤 합니다만 우리 어른들은 우선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의 본분을 제대로 지키고 있나 하고 말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진정한 내적 성숙은 항시 자기반성을 전제로 두고 있다는 진리를 또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리사랑의 표본을 제게는 어머니께서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당신의 보여주심은 제게는 아직도 이해 못 할 수수께끼이기도 하지요. 저도 지금은 거의 다 큰 딸아이를 두고 있습니다만 제가 당신께 받은 그런 내리사랑을 제 딸아이한테도 보여줄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합니다. 단지 이러한 내리사랑에 힘입어 자칫 샛길로 빠질 수도 있었을 저의 성장 과정에서 그래도 제 스스로를 올바로 지킬 수 있었으며 결국 지금의 나가 가능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이러한 어머니께 대한 孝는 절대 강제가 될 수 없겠지요.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