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라 사막의 사람들 사는 모습을 소개하는 한 독일 TV 방송에서 얼핏 들은 말인데, 그 곳 사람들에게 물이 소중하듯 차 또한
자기네들의 소중한 마실거리로서 아끼고 가꾸고 있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네들은 첫 번째 잔은 삶처럼 쓰며 ("bitter wie Leben") 두 번째 잔은 사랑처럼 달콤하며 ("suess wie Liebe")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잔은 죽음처럼 부드럽다 ("sanft wie Tod") 말한단다.
어찌 보면 태어나 살다가 죽는 전체 모습을 삼등분해 간단명료하게 해학적으로 표현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단지 마지막 세 번째 잔에 연관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독특하다. 죽음이 부드럽단다. 이를 어찌 봐야 할꼬?
삶이 쓰다는 말에야 나 또한 천번 만번 고개를 끄덕이련다. 지금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를 겪고 있으니 말이다. 살아봤으니 삶이 씀을 안다.
사랑이 달콤하다는 말, 위에서만큼의 끄덕임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정은 하기 힘들다는 사실 또한 고백한다. 사랑해 보았으니 사랑이 달콤함을 안다.
그런데, 죽음이 부드럽다, ..., 죽어봤어야 이게 헛소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는가? 남의 죽음에 대해 부드럽다는 평(?)을 댄다면 이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산 자의 죽음에 대한 내지는 죽은 자에 대한 소감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죽어보지 않았으니 죽음이 부드러운지 내사마 모르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죽음이 무서워 사시나무 떨 듯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바로 그 두려움의 상징인 죽음이 >>부드럽다<<하니 쪼께 아니 많이 기가 차긴 찬다. 죽음, 죽음, 죽음?
아님,
아랍권의 죽음에 대한 기본 사고를 좀 배워야겠다.
어찌 보면 태어나 살다가 죽는 전체 모습을 삼등분해 간단명료하게 해학적으로 표현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단지 마지막 세 번째 잔에 연관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독특하다. 죽음이 부드럽단다. 이를 어찌 봐야 할꼬?
삶이 쓰다는 말에야 나 또한 천번 만번 고개를 끄덕이련다. 지금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를 겪고 있으니 말이다. 살아봤으니 삶이 씀을 안다.
사랑이 달콤하다는 말, 위에서만큼의 끄덕임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정은 하기 힘들다는 사실 또한 고백한다. 사랑해 보았으니 사랑이 달콤함을 안다.
그런데, 죽음이 부드럽다, ..., 죽어봤어야 이게 헛소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는가? 남의 죽음에 대해 부드럽다는 평(?)을 댄다면 이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산 자의 죽음에 대한 내지는 죽은 자에 대한 소감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죽어보지 않았으니 죽음이 부드러운지 내사마 모르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죽음이 무서워 사시나무 떨 듯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바로 그 두려움의 상징인 죽음이 >>부드럽다<<하니 쪼께 아니 많이 기가 차긴 찬다. 죽음, 죽음, 죽음?
아님,
아랍권의 죽음에 대한 기본 사고를 좀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