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

정신박약아

서동철 2010. 4. 29. 05:02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부부를 십여년 만에 다시 보았다. 딸아이 하나더만 지금은 삼남매다. 막둥이는 엄마가 마흔 넘어 얻었단다. 둘째 딸은 열한살인데, 정신박약아다. 익히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아이들은 그러니까 난생 처음 보는 셈이었다. 둘째 아이가 인상적이었다

역에서 우리를 마중한 토마스의 안에서 처음 만난 그의 둘째 딸과 서로 이름을 교환하며 얼굴을 익혔다. 멜라니. 아이가 이름을 부르며 자기 손을 잡아보라는 장난기 섞인 주문을 던지길래,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딸아이가 바로 옆에 앉았는데 이름을 먼저 부르며 수작을 걸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자기한테는 생소한 동양인의 이름인데 발음이 거의 명확했으니 우선 기분이 삼삼하니 좋았다. 물론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는 놀이판을 차안에서 벌렸다.  

멜라니의 부모와 서로 연락이 없었던 시절의 이런 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멜라니의 엄마는 정신박약아를 키움에 있어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전해주며 다른 한편 아이를 통해 자기 생이 더욱 풍부해졌음에 고마움까지 느낀다는 고백 또한 잊지 않았다. 얘기를 듣고 나는 문득 자기 방에서 놀고 있다는 멜라니를 살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 슬그머니 이층으로 올라가 아이 방을 두드리고 살짝 문을 열었다. 멜라니는 라디오를 들으며 오늘 선물로 받은 어린이 교육용 책을 읽고 있었다. 함께 읽었다. 단어나 발음이 단순하지 않은 단어들은 읽는 어려움이 있음을 알았다. 허나 읽는 도중 간간이 자기 언니와 남동생과의 일상생활이나 (특수)학교생활을 전해주는 모습에선 여느 아이들과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자기를 소개하는 아이의 얼굴에서 다정함을 물씬 느낄 있었다. 가끔씩 초점이 맞지 않는 아이의 눈을 통해 엿본 순간적인 아스라함은 얼굴의 다정함 속에서 약간은 이상야릇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멜라니는 나를 뜰로 안내했다. 나의 손을 잡고 끌고가다시피 하더만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토끼와 메르슈바인헨을 내게 자랑했다. 자그마한 동물들과 자기와의 특별한 관계를 공개하며 이들의 하루일과를 제법 소상히 서술했다. 두어번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팔이 그러기에는 너무 짧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포기하며 대신 나와 팔장을 끼곤 했다. 활달하고 다정다감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아무 꾸밈없이 내게 전하는 멜라니의 천진난만함에 나는 취할 밖에 없었다. 

자기 동무 중에 스테판이라는 아이가 있단다. 동무와 하루도 빠짐없이 이야기를 나눈단다. 근데 며칠 전에 아이가 죽었는데, 하염없이 울었다고. (나중에 토마스에게서 이는 사실임을 확인했다.) 허나 다행히 스테판은 다시 살아나 자기와 함께 매일 놀고 있고 지금은 자기만 알고 있는 곳에 숨겨 놓았다며 씨익하는 웃음을 보였다. 어디에 숨겼냐며 묻지는 않았다. 

헤어질 멜라니는 나보고 어디에 가냐며 물었다. 그래 지금은 집에 가지만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꼬옥 껴안았다. 아니면 니가 우리 집에 오든지 했더만 방긋 웃으며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며 박수를 쳤다. 


정신박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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