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방

로스트로포비치

서동철 2010. 4. 15. 20:28

Mstislaw Leopoldowitsch Rostropowitsch (1927 - 2007)


첼로연주계의


러시아의 젊은 청년이 20세기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를 찾았다. 당시 이미 이름이 나있던 작곡가의 제자가 되고자 해서였다. 그래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가르침 받겠다고 부탁할 참이었다. 단지 청년 생각에 유명한 쇼스타코비치의 시간을 자기의 볼품없는 피아노 연주로 뺐고 있으니 되도록 빨리 연주해 불필요한 미안함을 모면해 보고자 했다. 연주 쇼스타코비치는 청년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가르침을 있음에 자기로선 영광이며 매우 기쁘다며 제자로서의 입문을 승낙했다. 후에 로스트로포비치는 회고하기를, 자기 평생 때만큼 피아노를 빨리 연주한 적이 없단다


Mstislaw Leopoldowitsch Rostropowitsch, 1927 3 27 러시아의 카스피 호수 바쿠에서 태어났다. 피아노 연주자였던 어머니로부터 4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첼로연주자인 아버지로부터는 6 때부터 첼로를 배웠다성인이 후엔 지휘자로서도 작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음악계에선 따라서 20세기 초반 첼로연주자와 지휘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던 파블로 카잘스의 후계자로 로스트로포비치를 꼽는다. 귀엔 허나 최소한 슈베르트 현악오중주(D956) 연주에 있어서 카잘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들린다만


그는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에 살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곡가들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이들로 부터 때론 첼로 곡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덧붙여 피아노 연주의 사람 리히터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지금 듣고 있는 베에토벤의 첼로-피아노 이중주는 사람들의 연주작품이다

스탈린 시대를 거의 문제없이 거칠 있었던만큼 그는 정치적이지 않았다. 허나 브레즈네프 집권 당시 러시아의 소설가 솔제니친을 알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삶은 180 바뀌었다. 이에 1970 외국여행불가에 이어 기한 허락 결국 소련에서 추방당한 국적까지 잃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회고하며 자신은 가지 완전 별개의 삶을 꾸렸다고 말한다. 추방 시절 미국의 워싱턴 심포니 악단에 지휘자로 일하며(1977-1994) 악단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추방생활은 끝이 났으며 전에 잃었던 국적과 업적에 대한 표창등을 1990 다시 찾을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그는 베를린으로 달려가 챨리 검문소 장벽 옆에서 Bach 연주하는 모습은 전파를 타고 세계로 전해지기도 했다


결혼은 소프라노 가수 Galina Wischnewskaja 1955년에 했으며 슬하에 둘을 두고 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아내를 위해 피아노 반주자로도 무대에 등장하곤 했다. 둘이 처음 알게된 때에 갈리나는 이미 사람의 아내였다. 허나 사이에 불붙은 사랑의 힘은 갈리나로 하여금 결국 재혼을 위한 이혼을 하게 만들었다. 들리는 일화로는 갈리나는 남편이 자기가 떠나면 자살하겠다는 협박에 머뭇거리며 괴로와 하고 있었는데, 로스트로포비치는 어느 갈리나에게 말하기를, 남편한테 작별을 고하고 오후 4시까지 자기 집에 오지 않으면 이상 자기를 생각 말라는 엄포를 내렸다 하는데, 갈리나는 결국 집에 돌아가 짐싸고 남편한테 작별을 고하고야 말았다 한다


그는 제자들한테 엄격했다. “You must compose! Keine Kopie sein!”, 그가 제자들에게 즐겨 들려주었던 교육지침이다. 곡을 연주함에 있어 베끼지 말고 모방하지 말고 곡의 의도를 나름대로 파악한 스스로의 독창력으로 소화시켜야 함을 일컫는다


로스트로포비치는 2005 이후 공개연주는 하지 않았으나, 자기 자신을 위한 연주는 계속 했. 2007년 4월 한님께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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