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철학함에 있어 나를 항상 동반하는 그런 질문이다. 나의 철학함을 이끄는 동아줄이라고나 할까? 결국 철학함이란 내게 있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끊임없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들숨과 날숨에 우주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는 등의 휘황찬란한 가르침은 나중에 무엇인가를 터득한 연후에 다시 떠올리기로 하고, 지금으로선 하루하루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몇 줄 글을 끄적거리는 이 일상생활의 삶에 나는 과연 어떤 뜻을 부여하는가 하는 점에 골몰하고 있다. 그것도 짐승과 다른 사람의 삶에, 물론 신과 같은 절대자와도 또한 다른 사람의 삶에 말이다.
어찌 보면 허나 막연하게 들릴 수도 있는 그런 질문이다. 사람이 아무리 짐승이나 신과는 다른 존재다 하며 구분을 해도 막상 그러니까 사람다움을 결정짓는 요소가 무엇이냐 물으면 이 역시 결코 작은 질문이 아니라 보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도 그렇다. 너의 삶 내지는 그녀의 삶 등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무대 위에 올리기 보다는 산다는 것 자체를 따지자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는가 말이다. 이렇듯 일단은 공허하게 들릴 위험부담을 걸머지고 그래도 던져야 하고 받아쳐야 할 질문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떨구지 못하니 우왕좌왕 비틀거림에도 불구하고 그 속을 채워나가는 일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느낌은 생의 바탕이다
지난 세기 중반 이후 줄곧 서구 철학계를 주름잡는 한 철학적 방향인 언어철학은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내지는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가 난무할 때 생긴다’는 등의 메시지를 전한다. 철학함을 언어로 표현되고 또한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에 한정하려는, 그럼으로써 명확함 내지는 그 경계를 세우고자 하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짜장 옳은 짓일까? 철학함이 우리 생의 성숙을 위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노력의 모습이라 여긴다면 이를 ‘말함’이라는 거울에 한정해 비추어 봄은 生을 위한 봉사에 충실하지 않음과 다를 바 아닐까?
느낌 말이다. 느낌 없는 생이 있을 수 없듯 느낌은 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바탕이다. 그래 하는 말이다: 철학함의 과제가 생을 생답게 유지하고 만드는 데 있다면 느낌을 철학함의 출발점이자 철학함이라는 집짓기 작업의 주춧돌로 삼아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물론 말함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느낌은 애매모호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느낌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있음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우리 생의 구석구석에서,. 때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는 중요한 순간에 바로 이 느낌이 결정적 역할을 맡는 경우를 겪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건대 철학함의 모습에서 느낌을 배제함은 생에의 부정과 직접 연결되는 어처구니 없는 처사다.
말함을 통해 어두운 느낌을 한웅큼씩이나마 밝음으로 끌어올리는(내리는) 작업 또한 물론 병행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세상살이에 그나마 뚜렷한 획을 그으며 나름대로의 노둣돌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어떠한 모습으로 말함이 느낌을 밝음으로 인도하는가를 보이는 일 역시 철학함의 맥을 짚는 모습이다. 오늘은 허나 이러한 철학함에 운을 일단 떼어 봄에 만족을 하고 다음의 말로 끝을 맺는다:
느낌없는 말함은 속 빈 강정이요 말함없는 느낌은 어두운 굴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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