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방

피히테 - 둘

서동철 2011. 2. 4. 17:02

그는 어떻게 살았나?

1762년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Rammenau. 우리의 정약용과 동년배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아버지는 수공업자였다.

1770 von Miltitz라는 사람이 교육을 위해 그를 거두었다. 후에 Krebel 목사가 이를 이어 받았다. 이들의 도움으로

1774 마이센에 위치한 라틴어 학교를 다닐 있었으며 

1774년부터 1780년까지 나움부르그에 있는 유명한 Schulpforta 학교에 다녔다. 19세기 중반에 니이체 역시 학교를 다녔다. 신학과 고어를 중심으로 아주 엄격하게 가르치는 보수적 학교였다

1780년부터 1784년경까지 예나, 비텐베르그, 라이프찌히 등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철학이 아니다. 자신의 나이 18살에 시작한 대학생활에 대해선 알려진 사실이 가뭄에 콩나듯 드물다. 단지 재정적으로 혹독한 고생을 겪어야 했음을 후에 그의 아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재정후원자였던 von Miltitz 도움이 끊긴 이후 가정교사 일을 통해 입에 풀칠하기에 바빴다. 하도 고생이 심해 1788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1788 하루하루 제대로 끼니 잇기도 힘들었던 상황에서 극적으로 스위스의 쮜리히에 가정교사 자리를 구했다. 곳에서 후에 자신의 아내 요한나 란을 알게 되어 약혼까지 갔다.      

1790년에는 허나 다시 라이프찌히에서 되돌아갔다. 스위스의 가정교사 자리는 자신의 진보적 교육원칙과 해당 집안의 보수성이 충돌하여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결국 일자리 찾아 삼천리였던 셈이다. 물론 가정교사 . 일은 허나 정규직은 아니고 가르치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만 두어야 했던 일종의 비정규직이었다. 허나 바로 해에 그의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칸트철학을 알게 게다. 학생이 그에게 칸트철학에 대해 과외를 받고 싶다는 청에 의해 우연히 접한 철학이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숙명적인 만남을 이루었던 게다. 피히테의 칸트철학 입문은 거의 전설적이라 정도로 유례없는 빠른 속도로 그것도 꽤나 깊숙히 진행되었다. 특히 전까지 신에 의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이미 빈틈없이 계획되어져 있음을 믿는 결정주의자였던 그는 칸트철학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방향을 180 틀게 되었다. 후에 스스로 자신의 철학적 가르침에서 반복하며 말하듯 피히테철학의 바탕은 인간 의지의 자유에 근거한다

1791 바르샤바에서 프랑스어가 짧다는 이유로 가정교사 자리를 잃은 7 칸트가 살고 있는 쾨니스베르그에 도착했다. 대철학자를 직접 만나 자신이 끄적거린 종교철학적 논문모든 현현의 비판적 노력 선보였다. 칸트는 글의 출판을 권하며 출판사 주선까지 해주었다

1792 부활절 피히테의 윗글이 출판된 세상사람들은 글을 오랫동안 기다렸던 칸트의 종교철학에 대한 글로 여겼다.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자 피히테는 졸지에 유명해졌다는 부수효과도 맛볼 있었다. 연말에 단찌히에서 가정교사 노릇

1793 다시 쮜리히 . 가을 약혼녀와 결혼. 전에 사상의 자유와 프랑스혁명에 대한 편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생각의 자유를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정립시키며 프랑스 혁명의 기본정신에 동조하는 내용이다. 익명으로 발표한 이유는 정치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고 피히테 스스로 밝혔다. 결혼 신혼의 단꿈을 만끽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세상에 선보일 새로운 철학함에 대한 청사진을 엮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에 준해 쮜리히의 몇몇 지식인들, 예컨대 라바테르, 페스탈로찌 등을 위해 개인적으로 철학강의를 했다. 아내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을 게다

1794 독일의 예나대학 철학교수 제안을 받았다. 칸트철학의 후계자로 칭송되었던 라인홀드가 담고 있던 예나대학을 버리고 봉급을 준다는 킬대학으로 옮기는 바람에 그의 후계자로서 전임자의 추천, 괴테의 동의 등에 힘입어 얻은 기대하지 않았던 교수 자리였다. 사실 피히테는 쮜리히에서 가정생활을 꾸리며 글쟁이로 살고자 하는 계획을 품고 있었는데, 졸지에 독일의 정식학계에 제대로 진입할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물론 그와 그의 아내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예나대학은 독일의 일류대학으로서 쉴러 역시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그는 자기 고유의 철학을 주제로 강의를 벌렸다. 이름하여 Wissenschaftslehre, 철학에 해당하는 Philosophie 대신 그가 제안한 용어다. 철학이 학문 중의 학문이란 뜻을 전하고자 했으니 우리말로학의학이라 번역함이 어떨까 싶다

그가 죽기 전까지 이런 저런 강의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알리고자 욕을 무지 봤는데, 합쳐 10 이상의 상이한 버젼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예나의 버젼은 번째로서 이에 걸맞는 모습으로 제목에바탕(Grundlage)’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피히테 살아 생전 책으로 온전히 세상에 발표된 유일한 버젼이다. 그만큼 피히테철학 연구에 있어 핵심을 차지하는 철학고전이다. 이를 근거로 후기를 전기와 상이하게 보는 무리와 그렇지 않고 후기 역시 전기의 핵심생각을 그대로 잇고 있으나 외형을 군데군데 바꾸었다는 무리로 견해가 나누어져 있는 형편이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문제는 허나 책의 이해가 만만치가 않다는 있다. 내용의 어려움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 책을 원래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책으로서 만들기 보다는 대학 강의의 자료로 엮은 글로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부터 자기가 강의를 통해 직접 내용을 보충하고자 했던 그런 원고였던 셈이었다. 그래 번에 끝가지 써내려가지도 않고 대신 서너번에 걸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진행한 근본 이유는 자기가 강의할 내용을 옮겨적느라 신경을 쓰다 보면 받아쓰기에 바빠 결국 강의와 동시에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는 모습을 잃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스스로 생각하는 모습’, 이는 피히테가 칸트철학을 알기 전인 결정론자였을 때부터 변하지 않는 그의 좌우명이었다

1795 강의원고가전체 학의학의 바탕이라는 제목을 갖고 책의 모습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이의 해석을 위한 몇몇 시도가 독일학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아직까지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고 있다. 우선 절대자아를 다루는 장에 대한 해석이 아직도 끝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에 한국 철학자가 시도에 동참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나 대학에서의 번째 학기였던 여름학기에 일단의 예나대학생들로 이루어진 무리와의 충돌로 Ossmanstedt 피신함. 이들은 엄한 내부 규율로 뭉쳐진 폐쇄적 성격의 무리를 이루고 사회의 일반 규범을 무시하며 과도한 알코홀 섭취 등으로 자신들의 태생적 특권을 누리고자 했던 , 피히테는 무리의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던 게다. 이들은 이러한 피히테에 반발에 불만을 품고 그의 집에 몰려가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그를 프랑스의 혁명의 동조자로서 비밀혁명단체를 결성한다는 모함을 해대고 심지어 대낮 거리에서 피히테의 부인에게 욕설을 퍼붇는 위협적인 태도를 보임에 피히테 가족의 피신은 피할 없는 일이었다. 허나 겨울학기에 예나로 돌아와 강의를 다시 열었다

1796학의학 근거한 법철학서자연법 바탕 세상에 내놓았다.

7월에 그의 유일한 아들을 얻었다. Immanuel Herrmann, 앞의 임마누엘은 베들레헴의 임마누엘이 아니라 쾨니그스베르그의 임마누엘, 칸트의 이름에서 따왔다. 만큼 칸트를 존경하는 피히테의 마음을 읽을 있다. 외아들은 후에 아버지마냥 철학자로 이름을 남겼으며 아버지의 유고를 정리해 전집을 출판함으로써 피히테철학의 역사적 발전을 가능케한 장본인이다. 아들도 이런 아들을 둬야 집안이 산다

1798 그의 도덕철학적 주저인도덕가르침의 체계 출판한 유명한무신론 논쟁 벌어지기 시작했다. 피히테가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주장에 아니다라는 피히테의 자기변호가 맞붙었는데, 싸움은 1799년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피히테는 예나대학 교수자리를 내놓고 베를린으로 이사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싸움의 구체적인 모습은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그리기로 하고 지금은 당장 급한대로 스케치한다:

Forberg라는 이전에 피히테의 제자였던 철학교수가 피히테가 편집인으로 일하고 있던 철학잡지에종교 개념의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실었다. 후에 무신론적 논문으로 낙인이 찍힌 글의 내용에 만족을 하지 못한 피히테는 논문이 실린 잡지 부분에 촌평조로 자신의 짧은 글을 덧붙였는데, 역시 세인들에게 무신론을 대변하는 글로 물의를 일으켰던 게다. 피히테철학은 신이 해와 , 그리고 삼라만상을 창조했다는 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을 형이상학적 도덕적 세계에 군림하는 자로 국한시켜 보고자 한다. 달리 말하자면 피히테는 자기고유의 철학적 원칙에 초지일관 충실을 기하며 모든 철학적 사고와 행동의 바탕을자아(Ich)’에서 보고자 했다. 단지 신이란 개념은 감성의 세계를 완전 벗어난 것이기에 개념과 관계를 맺을 있는 영역은 오로지 초감성의 세계, 도덕적 세계일 밖에 없다는 그의 결론이다. 이러한 도덕적 종교관은 그와 같이 철학에 단련이 되지 않았던 당시의 세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특히 일상의 감성적 세계에서 종교를 통해 행복을 찾고자 하며 모든 일용양식들을 신으로부터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피히테의 철학적 종교에 대한 가르침은 신이 없다는 얘기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던 게다

피히테의 종교관은 한편으론 종교를 지나칠 정도로 철학적으로() 해석을 하고 펼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킬만 했다. 그는 결국 후에 종교적 내지는 기독교적 믿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허나 다른 한편 우리는 그의 이러한 엄한 가르침을 종교의 지나친 세속화를 경계하는 소리로도 이해할 있을 게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어렵지 않게 있는 크고 작은 교회들의 횡포를 염두에 두건대 더욱 그렇다. 일주일 내내 이런 저런 사기로 돈을 모으고 일요일 하루 교회에 나가 헌금 두둑히 지불하면 천당간다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은 짜장 구역질 나는 세속화의 모습이다. 지난 대선 땐 보수적 목사들이 연말의 대선 특정 후보들에게내가 너희를 낙선케 하리니…”라는 헛소리를 내질렀다 하니 점입가경이다. 피히테의 사자후가 그립다.  

1800년에 가족들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를 했다. 이에는 독일낭만주의의 선구자라 일컫는 F. Schlegel 도움이 컸다 전해진다. 그만큼 그를 비롯 Tieck 낭만주의자들과 직접적인 교류가 활발한 시기였다. 슐레겔의 친구 Novalis 허나 피히테와 그의 강의를 통해 90년대 중반에 예나에서 익히 안면이 있었다. 독일낭만주의의 탄생에 있어 피히테철학이 차지하는 핵심적 역할을 미루어 짐작할 있는 역사적 만남들이다.  

이후 이삼년간 활발한 저술 활동을 보이는데, 이는 그의 철학적 성숙이라는 이외에 돈을 벌어야 했던 당시의 상황적 압박이었다고도 보인다. 어쨌든 저술 활동이 활발하다 보니 그의 철학에 대한 논쟁 또한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물론 pro et contra. 아쉬운 점은 허나 이러한 논쟁을 통해 얼추 1803년까지 때까지 편지등을 통해 가까이 의견교환을 나누었던 라인홀드, 야코비 그리고 셸링 등과의 친분에 금이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1804년에 베를린에서 무려 세번에 걸쳐 연달아학의학강의를 벌렸다. 강의록이 전해 내려온다.

1805 여름학기에 Erlangen 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지금은 바이에른에 속한 지역이나 당시엔 베를린과 함께 프로이센에 속했다. 겨울에 휴가를 받아 베를린에 돌아갔다.

1806 베를린에 머물던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예나 등에서 패했다는 소식에 쾨니그스베르그로 피신했다

1807 겨울 쾨니그스베르그에서 강의를 했으나 나폴레옹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에 다시  코펜하겐으로 도망쳤다

1808 Tilsiter 평화협정 가족이 있는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우리에게 알려진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민족교육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1810 새로 설립된 베를린 대학 철학과 과장교수로 임명되었다

1811 대학 초선 총장으로 선발되었다.

1812 학생들 소동으로 총장직에서 사퇴했다.

1813 평화협정이 깨지고 나폴레옹과 다시 전쟁을 벌리는 통에 강의를 중단해야 했다

1814 전쟁 부상자를 치료하던 피히테의 부인이 부상병으로부터 못쓸 병을 얻었다(1 3). 피히테는 자기 부인으로부터 병에 전염되어 1 29 죽었다. 나이 쉰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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