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방

맑스의 物

서동철 2010. 12. 13. 18:29

맑스 철학, 이 청년 맑스의 자기 사상 토로에서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 배울 구석 분명 많습니다. 살아 있는 말들, 아직도, 아니 오히려 '세계화'의 시대라는 지금 더욱 더 강렬하게 꿈틀거리는 그런 생생한 말들을 뚜렷이 엿들을 수 있습니다. 제 스스로 이리 확신하매 이에 대해 여러 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단지 제가 공부하는 맑스는 맑스 전체가 아니라 맑스가 헤겔 철학과 왜 그리고 어떻게 싸움을 벌렸는가 하는 구석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드리는 어줍잖은 맑스 철학에 대한 이해는 이에 한정된 소위 '청년 맑스'일 수 밖에 없음을 밝힙니다. 

I. 

"나는 생각한다, 꼬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꼼지락 거리는 가르침입니다. 제가 아는 척을 좀 해가며 라틴어로 말씀드리면: Cogito, ergo sum(코기토, 에르고 줌)이라 떠듭니다. 독일 관념론의 탄생에 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파고 들면 무진장한 철학적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 그런 말입니다. 예컨대 이 가르침의 논리적 정당성의 성립을 위해 일종의 전제가 되는 또 다른 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덧붙여 위의 그 '꼬로'는 앞의 생각함과 뒤의 존재함의 상호 논리적인 연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생각'과 '존재'가 서로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등등의 질문들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허나 이러한 질문들을 우리의 소중한 환자들 다루듯 하기에는 맑스가 너무 설쳐대는군요. 그래 위 문장에서 '생각'과 '존재' 만을 따오려 합니다. 철학함의 활동하는 영역을 대강 이 두 범주로 나누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이를 대신해 적지 않은 철학자들 때론 '의식'과 '현실성' 뭐 이런 표현으로도 씨부렁거립니다만, 하여튼 두 범주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한 쪽은 추상적이고 또 다른 한 쪽은 구체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여튼 이러한 나눔의 분석적 철학함이 있는 반면 동시에 이를 극복하여 재통일 시키고자 하는 종합의 철학함 또한 그 위세를 늦추지 않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하나의 근본적인 통일체를 꾸미려는 정신의 노력을 철학함의 근본으로 꼽을 정도이지요. 그럼 이 통일성을 주도하고 이루는 그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겠는 바, 바로 이러한 주체적 임무를 헤겔은 자신의 개념 '절대 정신'에 부여합니다. 그것도 이중적 의미로서의 주체입니다: 그 바라마지 않는 통일성은 바로 이 절대 정신 안에서, 그리고 바로 이 절대 정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울부짖습니다. 

맑스는 허나 이에 건방지게도 반기를 듭니다. 당신이 내세우는 그 목표 설정에는 내 십분 동의하나 이에 도달하는 방법엔 내 그러지 못하겠다며 과감하게 나서며 까대기를, 헤겔은, 위의 나눔에 견주어 말한다면, '생각'쪽에 너무 치우쳐 있다 합니다. 그 '절대 정신'을 주체로 내세움이 이를 뚜렷이 반증한다 외칩니다. 오히려 '존재'를 보다 더 앞세움이 옳다 사자호를 토로하면서요. 

그런데 우리 청년 맑스의 주장을 쪼께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에 문제가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맑스의 생각대로라면 당연 그 주체 '절대 정신'에 대체할 그 무엇이 통일성의 주체로서 내세워져야 하는 것이죠. 바로 이 대체적 주체가 인간이냐 하는 점에는 우선 물음표를 달아 두고 싶습니다. 일단은 조금은 더 폭 넓게 보고 싶어서죠. 바로 그 유물론 말입니다. 物 개념이 팡파레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죠. 단지 맑스에게서는 아직, 제가 공부한 바로는, 이 개념에 대한 명확한 해설이 보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레닌의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그 뚜렷함 말입니다. 

II. 

그럼 도데체 이 物이 무엇인가? 당연 유물론 이해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에 문제가 만만치가 않아요. 단지 맑스가 헤겔에서 출발하며 이 양반의 '절대 정신'을 '물'로 대체하려 했다면, 그렇다면 이 '물'의 위치 또한 그 '절대 정신'에 상응해야 한다 감히 추측은 해 봅니다. 다시 말하면 헤겔에 있어 생각과 존재의 통일체를 이루는 주체로서 '절대 정신'이 상정되었다면, 그리고 이 통일이 '절대 정신' 속에서, 동시에 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맑스에 있어서는 그 통일체는 '물' 속에서 또한 '물'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맑스는 노동이라 표현하지 않았나 감히 씨부렁거려 봅니다. 

맑스의 노동에는 이에 따라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노동이 행해지는 물적 시스템이 그 하나요, 노동을 행하는 인간에 대한 관심입니다. 편의 상 전자를 노동의 객체, 후자를 노동의 주체라 일단 매겨봅니다. 흥미로운 점은 허나 우리가 자주 듣곤 하는 '소외' 또한 이에 따라 두 가지가 있다 맑스는 말합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만든 생산품이 자신에게 귀속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노동의 소외와 노동자의 노동이 자신에게 귀속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노동의 소외가 있습니다. 전자와 같은 '노동의 객체적 소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잉여 가치 문제에 준한 그 소외입니다. 제 인상에는 통상 '소외'하면 이 소외만을 꼽는 듯합니다. 편식이죠. 제 눈에는 허나 그 두 번째 '노동의 주체적 소외' 또한 버금가는 중요성을 띄고 있다 보이니 말이죠. 

우리가 분배적 평등을 말하는 경우 이는 제가 말씀드리는 '노동의 객체적 소외'에 속하는 문제라 생각되고, 반면 그 '노동의 주체적 소외'는 다분히 철학적입니다. 자기 존재의 본래 모습의 실현 과정이 노동이라 하며 이러한 자기 실현이 아닌 모든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라 꼬집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예요. 노동이 한갖된 돈벌이가 아니라 자기 본래의 모습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이 라는 이 진리의 목소리, 모든 사람들, 특히 자기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에 속한다 보거나 이 계급을 위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노동을 스스로들 짜장 이리 생각하느냐, 아니면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나의 삶의 진짜 알맹이는 노동의 저 너머에 있다, 달리 말하면, 노동 시간은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벗어나야할 나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시간이매 바로 휴식 시간 내지는 휴가 기간 동안에 누리는 노동 외적인 기쁨에서 내 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는 엄연한 노동의 소외를 저지르지나 않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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