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70년대까지만 해도 종로2가 네거리 한 쪽 구석에 생음악실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자그마한 공간에 까불락거리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과 더불어 담배 꼬나물고 맥주 마시고 쏘주 깔 수 있었던 드문 공간이었다. 거기다 무대까지 설치되어 있어 통기타 가수들이나 작은 밴드들이 연주하는 생음악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 당시 대한민국 사회가 뽐냈던 경직성에 비추어보면 그들에겐 거의 천국이었다.
나 역시 가끔씩 찾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만끽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대하지 않았던 경사가 터졌다. '신중현과 엽전들'을 그 공간에서 처음으로 직접 만난 게다. 말로만 소문으로만 듣던 신중현, 자그마한 - 아담하다라고 하기엔 솔직히 너무 작다 - 키에 그 작음을 감추고자 했던지 아니면 그 당시 유행이었던지 족히 10센티는 됨직한 굽이 달린 신발에 무지막지한 판타롱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색깔 또한 요란한 옷차림이었다. 그 때 그는 우리에게 생음악으로 '미인'을 베풀었는데, 솔직히 나는 이 곡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을 했었다. 어리둥절했었다고나 할까? 허나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점은 연주 뒤 그가 우리에게 보였던 열려있는 모습이었다. 조카뻘 되는 어린 놈들과 맞담배 피며 이런 저런 얘기를 서스럼없이 나누는 그의 '터져있음'에 그 당시의 고리타분한 기성세대와는 많이 '다른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당시 박정희의 똘마니들 중 한 명이 신중현한테 전화를 해 '각하'를 찬양하는 곡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 내지는 만들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데 예술가로서 어찌 한 개인을 위한 찬양곡을 만들 수 있겠는가며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단다. 이러한 장인정신이 화근이 되어 공개활동이 이후 금지되었다. 그래 그런 어린아이들도 찾는 무대 위에 오르기도 했던 게다. 참 무식한 나라였다. 아무리 두 동간 난 반도의 나라라 해도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 자기를 찬양하는 곡을 만들지 않았다고 그런 망나니짓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지금은? 무식도 여러가지 모습을 띄고 있는 듯하다.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린다. '봄비', 신중현 곡들 중 내가 아직도 흥얼거리는 드문 노래다. 김추자를 비롯 박인수, 그리고 최근엔 장사익까지 음반을 통해 신중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건강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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