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를 만나다
유 형,
이즈음 세네카를 만나고 있지요. 로마시대 사람, 우리에겐 허나 서양철학사에 등장하는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로 알려져 있고요. 어쩌면 폭군 황제 네로의 스승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뮌헨대학에서 철학공부할 때 이름은 들어봤지요. 단지 그 때 열중했던 칸트 내지는 피히테등 독일고전철학자들과는 별 인연이 없다 여겼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더군다나 네로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에 백안시했을 수도 있겠네요. 근데 며칠 전 몽테뉴가 이 사람 한번 만나보라고 그리 성화를 부리더군요. 자기가 아끼는 플루타르크와 더불어 꼭 알고 지내야 할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유 형 알다시피 제가 무지 사랑하는 몽테뉴가 적극 권하는데 어찌 못 들은 척 할 수 있겠습니까.
몽테뉴(1533-1592)보다 얼추 1500년 먼저 살았던 세네카(서기 전 4-65)가 자신의 구체적 삶에 그리 단물을 뿌린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나보다 얼추 500년 먼저 살았던 몽테뉴한테 얻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말인데, 시대적 차이가 얼추 세배이니 놀랄 수 밖에요. 나아가 그렇다면 몽테뉴마냥 나 역시 세네카한테서 내 구체적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단물을 뺄 수 있으리라는 추측 역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는데 그를 직접 만나보니 이 추측이 사실임이 확인되더군요.
이 양반 참 좋은 말들을 많이 남겼는데, 오늘은 그 중 딱 한 마디만 떠올립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돈이 없는 사람을 일컬음이 아니라 돈을 마냥 갈구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처럼 돈이 없는 사람을 가난하다 부르지 말고 이건희처럼 억대부자란 사람이 그것도 모자라 지 형제들과 다퉈가면서 내지는 노동자들을 억누르면서 쉬지 않고 돈을 갈구하는 그런 사람을 가난하다 불러야 옳다는 말이지요. 심심찮게 들리는 철학자들의 파격적 발언이라 그냥 넘기기가 쉽지 않더군요. 이 가르침의 내용이 풍기는 매력적 향기는 차치하고라도 이 양반이 사안을 바라보는 그 눈길에 내 눈길이 쏠리더라고요. 표면에 드러나는 어떤 객관적 수치보다는 그 속에 내포된 나 내지는 내 의식의 흐름에 눈길을 돌리는 모습, 바로 이러한 모습이 가치판단에 있어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들었지요. 이리 보매 제가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다 여겨요. 돈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있기에 완벽하다고는 보지 않으나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관피아 족들 마냥 입에 개침 흘리며 돈을 찾지는 않지요.
이렇게 항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되돌아보며 행동하는 모습을 세네카는 철학하는 삶이라 부릅니다. 덧붙여 바로 이렇게 사는 모습이 행복한 삶을 누림에 있어 바탕이라 주장하지요. 그러니까 철학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고. 맞는 말 아닙니까?
대한민국에도 세네카가 번역되어 있나 인터넷을 들춰보니 번역서가 있더군요. 근데 세네카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이를 영어로 번역한 책을 다시 한글로 번역했다 하는군요. 없는 것보다 낫다 하면야 할 말을 잃습니다만, 대한민국 번역이 왜 그리 초라하고 볼품 없는지 그 한 단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드네요. 라틴어를 한글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야 또 다른 문제겠지요. 출판사 하는 사람들 참, 일을 하지 말든지, 할려면 제대로 해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권력과 돈에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눌려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문화가 할 일이 그에 따라 엄청 중요함을 깨닳는다면 어렵고 힘들어도 소위 사명의식을 갖춤이 시대정신이 아닐까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