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철학과의 관계
칸트, 독일 뮌헨대학에서 철학공부 할 때 내게 항시 채찍질을 해대며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동반했던 사람이다. 내 지도교수 헨리히는 수년간 세계헤겔학회 회장직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자기는 그 누구보다도 칸트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공언하곤 했다. 대한민국에 있을 땐 이름만 들었던 이 철학자의 철학을 실제 공부해 보니 배울 게 엄청 많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의식 바깥 세계에서 사람들 내지는 사물들이 어찌 움직이는가를 바라보는 대신 의식 안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가를 말하는 철학이다. 여기에 자의식 또는 동일성 등의 철학적 개념들이 등장하며 그 모습을 뽐내곤 했는데, 나는 불행히도 이러한 칸트철학의 핵심개념들을 아직도 완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 놈들인 게다.
이 칸트철학이 그 때 그 독일공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아울러 이어졌는가를 공부했을 때 아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곤 했다. 피히테를 비롯 야코비, 라인홀드 등 독일 철학자들이 칸트를 나름대로 소화시키며 내뱉는 모습들에서 사상을 육계장이나 짜장면 마냥 이리 씹고 또 곱씹을 수 있음을 배웠던 게다. 아울러 이들이 편지교환이나 논문발표등을 통해 서로 갑론을박 토론하는 모습들에서 자기생각을 나누는 진면목 또한 엿볼 수 있었다. 한 큰 사상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심화되는가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철학이 이처럼 튼튼한 바탕 위에서 철학사에서 유례없는 성숙과정을 뽐내니 언어예술 또한 자신의 아름다움을 흔껏 뽐내기에 열을 올렸다. 괴테와 쉴러가 우뚝 서 있었으며 - 특히 쉴러는 칸트 철학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 그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 독일낭만주의의 탄생과 성장이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어디 이 뿐이랴, 독일 언어예술사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휄덜린이 살았던 시기이며 - 이 사람은 칸트를 독일민족의 모세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헤겔이 철학했던 시기였다. 이 두 사람들은 동갑내기에 젊었을 땐 친구사이였다. 어찌 보면 세계정신사에서 유일무이한 시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정신문화사에 관심을 품고 이 시기를 공부하면 가끔씩 그 휘황찬람함에 눈이 부시기도 하다.
석박사 논문을 통해 이를 공부해 내 능력이 닿는대로 후배들에게 이 휘황찬란함을 그래도 차분히 전달하고자 하는 욕심을 품었다. 만약 제대로 전달이 된다면 어쩌면 대한민국 정신문화사에 한 자그마한 획을 그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야무진 마음까지 품었다. 근데 그 배움이 무지 힘들었다. 우선 그 내용이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고 언어 또한 독일어 최고의 수준이라 그런가 - 디터 헨리히의 말이다 - 내겐 사실 벅찼다. 그래도 반이라도 이해해보자며 주먹을 쥐곤 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박사논문 거의 마무리 짓고자 할 때라 기억한다, 이 짓을 내가 왜 하는가 하는 질문이 내 뒷통수를 퍽 하니 쳤다. 물론 위에 말한 목표가 그 뜻이야 가상하다만, 도데체 이 공부가 내 실제 삶을 얼마나 더 풍부하게 만드느냐 말이다. 칸트고 피히테고 헤겔이고 내 이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이상이 되는 무엇인가를 얻고 있는가? 이 철학들 자체를 두고 하는 소리라기 보다는 이들을 공부하는 내 모습을 향한 질문이다. 석박사 과정을 통해 내 삶이 더 훌륭해졌는가 말이다. 근데 왜 하필 논문에 마침표를 찍을 때쯤 되어 이 질문이 터지는지, 그에 따라 내 모습이 꽤나 초라해져 스스로 연민의 정이 쏟아지기도 했을 정도다. 불쌍한 놈, 제 갈 길을 여적 가늠하지 못하니, 쯧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