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

안빈낙도(安貧樂道)

서동철 2013. 1. 14. 19:00




일반적으로 앞부분 안빈을 이해함에 가난 속에서도 즉 가난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편히 가진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모습이다. 가난을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처한 상황, 외부에서 자기에게 강요된 피할 수 없는 처지로 여기는 해석이다. 나는 달리 보고 싶다. 한자의 본래 뜻이 이를 허용하는지는 일단 차치한다. 가난을 일부러 찾는 모습, 부자되기를 오히려 피하고 되도록이면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추구하는 말로 읽는다. 나아가 그래야 낙도가 가능하지 않나 여긴다. 가난 속에서 편히 살며 올바름을 즐긴다는 뜻에 가난을 찾아야 비로소 올바름을 즐길 수 있다라는 과격한 해석을 끼워 넣고픈 욕심인 게다. 정신은 물질이 빈약할수록 더욱 활기를 띈다는 생각과 다름없다. 거꾸로 말하자면 물질이 풍부하면 정신이 그 기를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도사가 되고 싶으면 갖고 있는 것 다 버려라 이 소리다. 버리지 못하겠다면 도사될 생각 품지 말고. 모두 도사가 되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니 갖고 있는 것 버리지 못한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단지 부자도사는 그 자체가 모순, 어불성설이다. 예수도 가르치지 않던가, 부자가 하늘나라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대한민국 몇몇 떼부자 목사들 전부 지옥 갈 사람들이다. 확신한다.


카뮈가 자신의 일기에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글을 끄적거린 흔적을 읽을 수 있다: „가난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궁핍 내지는 현대 노동자계급의 희망없는 일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활동적인 편안함과 연결된 가난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할 수 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역시 가난을 의도적으로 찾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물론 여유 속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일과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가난이라 부언한다.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없다고 울부짖는다. 되도록 가난하게 살고 편안한 마음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그런 삶을 꾸리라는 카뮈의 가르침이다. 그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쓴 일기다. 공자의 제자 안회와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단지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라는 말에 고대 중국과 현대 프랑스의 차이를 엿본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