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방

미학을 향한 두 가지 접근 방법

서동철 2012. 5. 6. 09:18



그렇습니다. 藝術 作品을 감상함에는 굳이 이런 저런 소위 美學이 필요있겠습니까? 그냥 느끼고, 때론 感知해가며 作品과 呼吸을 같이 할 수 있다면 그만이지요. 
단지 美學이 이러한 意味에서의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됨을 그 主目的으로 삼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오히려 다음의 두 가지 점에 더욱 큰 比重을 두고 美學에 接近함이 어떨까 감히 말씀드립니다: 

I. 
예술 작품에 대한 접근을 빌미로 자신의 哲學을 더욱 폭 넓게 펼치고자 하는 意圖입니다. 제 짧은 공부로는 대부분의 西洋 美學 理論들이 이를 추구하고자 하지 않나 합니다. Heidegger나 Kant가 그 대표적 예이겠지요. 

Kant나 Heidegger의 경우처럼 자기 고유 철학의 확장 심화의 한 작업으로서 미학을 던집니다. 그러다 보니 이 양반들의 철학에 대한 기본적 이해없이는 이들의 미학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지 않다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Kant의 경우 자신의 미학 이론을 담은 책인 '판단력 비판'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체계의 빈 틈을 메꾸었다 생각했습니다. 단지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들로서는 이 책의 주제인 미적 인식 또한 인식이니 Kant의 인식론에 대한 기본 이해 없이는 그 접근이 굉장히 힘든 작업입니다. 이러한 기본 이해를 갖고도 난해한 책인데 말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공부 무지 열심히 할 적에 그 당시 제 지도교수와 바로 그 '판단력 비판'의 '들어 가는 말'의 VII장, 그것도 겨우 두 단락의 내용을 갖고 한 학기 내내 토론했던 적이 있습니다. Kant의 소위 미적 인식의 내부 구조에 대한 집중 토론이었는데, 학기 말에 결국은 Kant의 이론이 비록 200여년 전에 발표되었다 하나 아직도 완전 해명은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군요. 단지 왜 그리 어려운가 하는 그 이유만큼은 알고 세미나를 마쳤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하, 그래도 나 혼자 멍청하지는 않구나' 하는 자위를 할 수 있어 잠시 행복했었습니다만. 크. 

그런데 'Kant가 A는 B다라고 말했다'는 정보 식의 지식보다는 '나는 이 양반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고백 식의 말이 제게는 훨씬 더 철학적으로 들립니다. 던져진 결과보다는 pro et contra, 즉 찬반의 논쟁을 통한 모종의 결과로 가는 도중의 싸우는 모습이 제게는 참으로 싱그럽고 향긋한 내음을 풍깁니다. 물론 각자 진지한 사고의 모습이 전제가 되겠습니다만. 

Heidegger의 경우는 Kant와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얼추 비슷합니다. 이 양반은 자신의 짤막한 미학에 관한 논문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허나 조금은 더 깊게 서술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Kant의 경우와 같이 이 양반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 대한 공부없이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그 특유의 개념의 근원적 의미를 통한 철학적 사유의 방법론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중추적 역할을 하는 개념 중에 Wahrheit, 즉 진리 내지는 참말이란 개념이 있는데, 이를 이 양반은 '감추어지지 않음(Unverborgenheit)'이라 풀어 씁니다. 고대 희랍어의 어원적 의미에 접근하고자 하는 언어철학적 방법론이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뜻과는 부분적으론 사뭇 다른 공자 시대, 즉 전진시대의 한자에 대한 본래적 의미를 다시 찾고자 하는 뭐 그런 철학함입니다. 

어쨌든 Heidegger의 미학은 20세기 유럽 미학 전개의 바탕적 역할을 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도 되겠죠. 소위 포스트모던 류의 미학 이론은 Heidegger 미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 닿으면 한번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II. 
작품을 受動的으로 감상하는 쪽보다는 能動的으로 만드는 쪽을 위한 理論으로서의 美學입니다. 즉 한 藝術家가 作品을 만들 때 어떠한 생각을 바탕으로 자신의 作業을 行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몇 뛰어난 藝術家들에 의해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들로는 Poe, Cezanne, Proust, Kafka, Klee, Celan, 그리고 무엇보다도 Beckett을 꼽고 싶습니다. 

사실 위 I에서 제시한 접금 방법이 때론 너무 어렵다 보니 저 같이 둔한 놈은 쉽게 샛길로 빠집니다. 이 와중에 접한 글들이 바로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의 예술론들입니다. 이들은 위 두 양반들과는 달리 철학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으니 언어 선택에 있어서나 그 내용 전개에 있어서나 어렵지 않게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나고 흥미진진함을 만끽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Poe의 논문 The Philosophy of Composition을 읽으시면 이 양반이 어떠한 사고의 경로로 자신의 시 The Raven을 지었는가를 그림을 보듯 눈 앞에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Cezanne의 편지글을 읽어 보시면 이 대 화가의 후기 작품이 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는가 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자들이 자신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이러한 작업을 했는가를 전달하는 글이니 이러한 글을 이해함으로써 어찌 보면 그 작품의 탄생 과정을 간접적으로나마 겪게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니 이 얼마나 신이 나고 흥미진진한 착각입니까. 

그리고 Beckett, 제가 가장 사랑하는, 최소한 제게는 20세기 최대의 문호입니다. 이 양반은 메타 예술, 즉 예술에 대한 예술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를 통해 제게 '아하, 이렇게도 예술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일종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 준 사람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의 주저 '이름지을 수 없는 자(The Unnamable)'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Adorno는 이 책을 줄을 쳐 가며 꼼꼼히 읽었습니다. 그래 결국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유고작 '미학 이론'이란 책을 꾸밀 수 있었다 합니다. 

韓國에서 美學하면 통상 위의 I의 경우 만을 생각하는 偏食이 蔓延해 있지 않나 감히 疑心해 봅니다. 제 個人的으로는 오히려 II의 美學이 더욱 더 신나고 흥미진진한데 말입니다. 

맺는 김에 김수영의 가르침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금 깊이 새겨 두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실생활이나 문화의 밑바닥의 精密鏡으로 보면 민족주의는 문화에는 적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언어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요, 그 생활은 민중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민중의 생활이 바뀌면 자연히 언어가 바뀐다. 전자가 主요, 후자가 從이다. 민족주의를 문화에 독단적으로 적용하려고 드는 것은, 종을 가지고 주를 바꾸어보려는 우둔한 소행이다. 주를 바꾸려면 더 큰 주로 발동해야 한다. 

언어에 있어서 더 큰 주는 시다. 언어는 원래가 최고의 상상력이지만 언어가 이 주권을 잃을 때는 시가 나서서 그 시대의 언어의 주권을 회수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이 수정의 작업을 시인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서 만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름다운 낱말들, 오오 침묵이여, 침묵이여.
"


붙은 말섞음:

그 - 

‘예술’이란 인간이 행하는 수많은 활동 중에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즉 창조해 내는 특수한 
활동을 가리키는 개념이며 
  
‘美’는 眞, 善 과 더불어 인간이 추구하는 많은 가치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배웠습니다. 

고대에서 ‘美’는 우리마음에 즐거움과 감탄을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대상의 추상적 성질이나 개별적 아름다움을 지시하고자 할 때 사용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이전에는 ‘예술’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으로 배운 것 같은데…. 
Fine arts 는 프랑스어인 beaux-arts 의 번역이고 예술은 ‘beauty’ 와 ‘arts’ 가 결합된 합성어 라고… 

‘美’에 대해 토론 하면 언제나 객관적 관점과 주관적 관점으로 나뉘어졌던 것 같아요. 
즉, 우리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과 감동을 받는다는 객관적 입장과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난 하나의 관념, 대상의 형식적 성질을 지각할 때 그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즐거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상의 성질 속에 ‘美’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관점이 주관적인 입장이지요. 

그러다가 점점 전통적인 美의 객관성이나 주관성이 바뀌면서 다른 미적 가치의 대두로 상대화 되면서 
美에 대한 이론들이 퇴조 되고 급기야 美는 미학적 논의에서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예술’ 이 주된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동시에 미적 경험은 예술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연이나 인간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고 보게 되지요. 이것은 개념적으로 미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구별은 외부에서가 아닌 내부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그래서 ‘미학을 향한 두  가지 접근 방법’과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현상을 뽑아 내어 보자면 

그 하나는 
‘美적’ 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어떻게 지각하고 인식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취하는 태도의 특성, 즉 사물과 대상에 대한 사유의 깊이와 폭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경험,… 
그래서 우리는 자주 ‘미적 경험’ 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다른 하나는 
‘예술적’ 이라는, 우리가 무엇을 창조 한다 할 때, 그것이 제작이든 표현이든 그 창작행위, 
창조활동의 특성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적 창조’라는 말을 합니다. 
(창조도 경험의 일환이라 하여 ‘창조적 경험’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이 경우 원칙적으로는 창조를 위한 전 단계의 예술가의 경험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예술 작품에 대한 접근과 이해함을 위한 철학을 하는 것과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 철학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 

그 수동적 그룹에 
관객, 관람자, 독자, 
그 능동적 그룹에 
배우, 작가, 제작자로 나눈다면 

예술과 철학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보면서 
동시에 
두 가지 방법을 두 그룹으로 나눠도 되는 겁니까?

나 - 
우선 예술 작품을 중심에 두고 - 님의 경우 - 동시에 철학을 꽤 넓은 의미로 염두에 둔다면 님의 구분에 굳이 반대는 하지 않으렵니다. 미학을 이에 맞추어 수동 미학과 능동 미학으로 나누려는 사람들도 있지요. 물론 이 구분에 가치를 두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한번은 이에 대해 점심식사하며 한 독일 여자 철학자와 어줍잖게 끌리듯 토론하다 이후 삼일간 속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식사할 때 골치 아픈 말은 사실 제게 타부거든요. 저는 나누고자 했고 그 여자는 이에 반대했지요.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남의 글을 읽을 때와 제가 직접 튕기는 글을 쓸 때의 기분이 전혀 상이하니 이에 걸맞는  미적 감각이 다르다는 얘기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단지 밑의 뒤샹에 대한 제 모자란 글에서 말씀드렸듯 현대 예술에 있어 님의 그 수동과 능동의 경계를 뛰어넘자는 예술가들의 시도 또한 있었음에 아울러 신경을 써 봅니다. 

칸트의 미학은 허나 이와는 달리 인식론입니다. 즉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어찌 인식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성실히 답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지요. 달리 말씀드리자면 미적 인식의 내부 체계를 밝히고자 한 철학적 노력입니다. 이 시대에 이런 노력이 또한 필요했던 유럽 사고 발전의 뒷배경 또한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대상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찾고자 했던 경향에서 서서히 그 형식적 측면에서 뽑아내고자 하는 경향으로의 이동입니다. 괴테 또한 이 후자에서 자기 방향을 잡은 흔적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형식에서 뽑아내고자 하는 미적 인식이 후에 19세기에 이르러 소위 '추의 미'라는 이율배반적인 개념을 가능하게 했던 초석이 되었지요. 

암튼 서양의 미학에 대한 공부는, 만약 현대에까지 그 영향력을 흔껏 느낄 수 있는 바를 찾는다면, 칸트와 헤겔에 바탕을 둔다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