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

중국의 천민자본주의

서동철 2012. 1. 26. 22:59



Samuel Beckett은 자신의 대표작 THE UNNAMABLE에서 이런 말을 던진다:

"But not so fast. First dirty, then make clean."
 
서두르지 말라는 권고와 함께 우선 더럽히고 그 다음 깨끗이 하라는 풍자적 표현이다. 독일 사회에서 살다보니 일자리 창출을 위해 이와 얼추 비슷한 모습들을 가끔씩 엿보곤 한다. 특히 ABM(Arbeitsbeschaffungsmassnahmen: 일자리 창출 정책)의 맥락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멀쩡한 도로를 일부러 부수고 보수한다고 야단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를 꼭 꼬집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람 사는 게 그리 돌고 돌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이미 오랜 전부터 품고 있다. 
 
반면 중국에서 이즈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판치고 있는 소위 천민자본주의에 관련해선 마구 꼬집고 싶다. 한 유럽인 기자가 중국의 한 정치학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이 작금 불고 있는 자본주의 열풍을 어찌 용인할 수 있는가? 아니 용인이라기 보다는 이 열풍에 지속적인 바람을 미친 듯 불어넣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정책에 과연 납득 가능한 설명이 있는가?
했더만 그 학자의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 사회주의 절대 지상 목표인 자본주의적 인민 착취의 소멸을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착취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작금 자본주의가 필요하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농담삼아 던지는 말인가 했다. 헌데 그게 아니다. 그 학자의 나름대로 진지한 대답이었음을 화면에 비춰진 그의 얼굴에서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베케트의 위 말에 딱 맞는 의식구조인 셈이다. 우선 더럽게 해야 깨끗이 할 건더기라도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는 등소평의 기조 정책 노선에 일치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모택동 사망 이후 등소평이 펼친 소위 경제적 개방 정책을 어찌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사회의 단계적 발전 이론을 앞에 내세웠다. 우선 자본주의 단계를 거쳐야 제대로 된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는 지론이다. 단지 이 모든 단계적 발전이 정치적으로 공산당 일당 독재의 통제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뭐 그런 소리다. 
 
"First dirty, then make clean."

베케트의 언어가 요약한 우리네 인간 삶의 치열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얼추 육년 여 전에 끄적거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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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 강정구 교수의 발언이 생각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육이오 전쟁 때 미군 애들 안 왔으면 400만명 안 죽고 금방 통일 됐다 지요 (문맥 생략 했고, 다만 이 발언 그 자체가 저에게 던져준 반성의 내용만 다루겠습니다). 비록 북한이 역사적 정통성에서 우위를 차지 한다 해도 (예를 들면 문학사에서 제대로 된 소설가와 시인은 다 북한으로 올라갔지요. 하지만 그 중 절반 이상이 숙청 당했습니다) 나의 현존을 규정하는 지금의 남한이 더 낫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적 정통성의 결여, 친일파 세력과 친미 세력의 지배로 인해 한국도 엄청한 상처와 아픔을 간직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더 자유롭게 보이고, 경제적으로도 발전한 한국이 훨씬 좋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항상 따라오는 게 있습니다. 박정희식 개발 독재로 인한 (물론 박정희가 없었어도 경제 발전은 있었으리라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경제 발전으로 우리 이만큼 살고 있는 거 아니냐? 로 박정희식 개발 독재가 최고다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는 철저히 물질적 현존으로 규정될 수 없는 인간의 사회이지요. 
즉 인간의 사회는 물질의 자기 발전 발전과 함께 이루어지는 인간의 의식의 발전의 측면이 있습니다. 물질의 발전, 그리고 이 물질과 함께 이루어지는 인간 의식의 발전, 의식에 의한 물질의 규정과 변화 등등의 요소가 '역사'를 구성하지요. 

'더러워도 잘 사는 게 좋다'는 이러한 독재자 향수에 쪄든 노예적 의식은 맹목적인 물질의 자기 발전에만 매달려, 스스로의 주체됨을 망각하고, 독재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수동적 의식입니다. 
이러한 수동적 의식은 인간이 스스로 물질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의 과정에 종속될 때 나타납니다. 즉 물질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그것을 주체적으로 규정하지 못할 때 나타나지요. 

박정희 시대가 과거에는 가능했습니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수동적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개발 독재가 가능한가 물을 수 있습니다. 이미 개발 독재의 시대는 과거적인 것이 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중국의 노동자들이 엄청난 착취를 당하고 있지요. 그것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기업으로부터 당하고 있습니다. 자본가들과 중국 정부는 이 착취의 산물을 그 기업가들과 나누면서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하고 있지요. 

저는 베케트의 말이 언제나 보편 타당한 말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인간의 사회는 역사라는 게 있으며, 이 역사 속에는 일정한 인간의 자기 인식이 있으며, 이를 통해 노예적 의식 속에 빠져있다가도, 그로부터 스스로 빠져나갈 수 있는 주체성 또한 가지고 있다는 걸 우리는 우리의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 - 위 베케트의 말은 해학적 표현이라고나 할까요? 이러한 표현은 언뜻 보기에 보편타당하지 않은 것을 보편타당한 듯 시늉을 지음으로써 보편타당한 진리를 전달한다 보입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저는 위 베케트의 말을 보편타당하다 여깁니다. 

마지막에 주신 말씀 속엔 한꺼번에 너무 무거운 짐들이 섞여 있어 제게 좀 버겁군요: 사회 속의 역사, 이 역사 속의 인간의 자기 인식, 노예적 인식, 주체성 등등 말입니다. 쪼께 풀어 말씀 주시겠습니까? 그래야 제가 일말의 틈을 엿볼 기회를 얻을 듯 해서입니다.


그 - 죄송합니다. 제가 뭔가 아는 척 하고 싶었나 봅니다. 사실 아는 것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나 봅니다. 

저는 인간의 의식이 항상 변화한다고 확신합니다. 
박정희 시대에는 사람들이 개발 독재에 '자발적으로' 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저는 능동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다시 말하면 주어진 경제적/정치적 상황에 대한 반성 없이, 그것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의식'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박정희식 개발 독재한다고 하면 이에 찬성할 사람이 없지요. 배불렀다 비판하지만 우리는 이제 조금씩 '능동적 의식'을 찾아가는 듯 합니다. 주어진 것에 대해 비판할 수 있기 위해선, 이 주어진 것에 한 걸음 떨어져 그것을 관조할 수 있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를 전 '능동적 의식'이라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이상 정치적 현실이 국민에게 수동적/ 노예적 의식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주장입니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시도합니다. 스스로 노예적 의식으로 규정했다가도 그
것에서 벗어나면 능동적/ 주체적 의식으로 규정하기도 하지요. 


그냥 예전에 피겔에서 중국 노동자들의 엄청난 착취 현실 기사를 읽고 굉장히 놀랬습니다. 전태일 열사도 그랬겠지요...


나 - 그럼 님은 이즈음 우리의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여적 불고 있는 박정희 바람을 어찌 설명하시렵니까? 
어쩌면 맑스가 옳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은 반복을 하는데, 단지 - "das eine Mal als grosse Tragoedie, das andere Mal als lumpige Farce."


그 - 그냥 바람이려니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와야 하는데... 
지금 벤야민의 폭력에 관련된 글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읽었는데 주옥같은 글이지요. Zur Krikti der Gewalt 
비극 개념이 지금 저에겐 화두입니다. 비극 글자만 보면 눈이 확 도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