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이야기

그로세스 로트호른 (2442m)

서동철 2011. 7. 21. 16:59

꼭대기에 올라 방명록을 들춰보니 작년 시월 초에 내가 한번 왔다갔다는 흔적이 있었다:

http://blog.daum.net/lebendigkeit/247


내 이름과 아울러 남한에서 왔다고 적혀 있었다. 일주일 뒤에 한 독일 내지는 오스트리아 친구가 홀로 왔다 갔나 본데 자기 이름 뒤에 북한에서 왔다는 문구를 붙여 놓았다. 그래 혼자 한참 크게 웃었다. 얼추 다섯시간 걸리는 꽤 힘든 오름길 뒤에 홀로 정상에 머물며 보인 그 장난기가 재미있다 여겨서였다. 그래 다시 한번 내 이름과 남한에서 왔음을 박아 두었다. 내년에 다시 오면 그 친구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얼추 아홉시간 동안 걸었는데 사람이라곤 나 혼자 뿐이었다. 방명록을 보니 작년 내가 왔던 이래 합쳐 열서너명 정도 꼭대기에 발을 디뎠다. 올해 들어 나를 포함해 총 여섯명 뿐이고. 꽤 험한 산임에도 길 표시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산장이 없으니 역시 달랐다. 산 자체는 참 멋진 모습을 뽐낸다. 사실 집을 나설 때부터 이러한 외로움을 만끽하고픈 마음에 이 산을 골랐는데, 기대만큼 만족스러운 산행이었다. 


이즈음 내 주변이 무척 어수선해 혼자 있고자 했다. 나 스스로를 우선 제대로 챙겨야 하지 않나 싶어서였다. 며칠 전 뮌헨에 있는 한 로펌회사로부터 경고장과 동시에 근 1000유로에 달하는 벌금을 내라는 독촉장을 받았다. 저작권보호를 전문으로 다루는 회산데, 우리 인터넷 연결을 통해 지난 오월 초에 미국산 영화를 내리받을 수 있도록 소위 교환시장에 제공되었다는 이유에서다. 난 처음에 장난편지 아니면 로펌회사가 사무실수를 저절렀다 여겼다. 그 영화 제목도 몰랐고 - 알아보니 이즈음 십대들이 무척 좋아하는 헐리우드 영화란다 - 더군다나 인터넷에 그런 교환시장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 말이다. 근데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을까? 인터넷에 연결되는 각 컴퓨터에 붙이는 IP 주소를 추적하는 일을 담당하는 회사가 따로 있는데, 이 회사로부터 로펌회사가 그 주소를 전달 받은 뒤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인터넷 연결회사로부터 실제주소를 얻는다 한다. 어쨌든 졸지에 도둑놈이 된 셈이다. 아니, 그 짓을 직접 하지 않았다 해도 최소한 우리연결을 통해 그 도둑질이 이루어졌으니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다. 처음엔 그래 해킹 당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알아보니 해킹보다는 오히려 IP 주소 추적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근데 이를 다시 한번 점검시키는데 수천 유로가 든단다. 그 벌금보다 몇배 더 비싼 셈이다 보니 우리마냥 봉변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신 억울해도 그냥 그 벌금을 내는 경우가 많단다. 법원 민사소송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재간이 없어서다. 지금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할 따름이다. 몇년이래 독일에서 이러한 경고장을 통해 로펌회사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수백만 유로에 달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저작권 보호라는 미명아래 법의 보호를 받아가며 꽤 짭짤한 사업을 벌리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법을 공부한 친구들이 세운 회사들이니 법을 운용함에 있어 어디에 약점이 있는가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여긴다. 듣자하니 그러한 경고장을 받은 사람들의 60% 이상이 자신의 무죄를 확신함에도 내지는 그 벌금이 너무 높게 책정되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경고장에 보이는 공갈협박성 문구에 제시된 액수를 그대로 낸다고들 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저작권은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여긴다. 허나 이를 빌미로 몇년이래 독일 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경고장 사업’에 제동이 걸려야 함 역시 마땅하다. 그래 이즈음 이에 대항하는 자발적 무리에 참가해 적극적인 싸움을 벌릴까 궁리 중이다. 단지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큰 위험은 피한다는 손자의 가르침을 일단 다시금 떠올려 본다. 조금은 더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올라갈 때 아무리 한번 와 봤던 곳이라 해도 맨 돌과 바위들로 이루어진 지역이라 제대로된 길을 찾기에 애를 써야 했다. 때론 어려운 암벽을 타야 했고. 그래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에 말한 억울함에 눌려 있을 수가 없었던 게다. 내려올 때 역시 두어번 길을 잘못 들어 욕봐야 했다. 더군다나 며칠 전 쏟아진 폭우로 그나마 있던 흔적들이 그대로 쓸려 내려가 방향 잡기가 꽤 힘들었다. 또 매우 미끄러워 조심조심 기어가듯 내려갔다. 산 중턱 좋은 데 자리잡고 있는 사냥꾼들을 위한 오두막집에 들러 샘물에 얼굴을 씻고 실컷 마신 뒤 감도는 훈훈한 기운에 몸을 닦았다. 저 밑 세상에 내려가 쌈박질을 할까나, 그래, 그게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