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방
갑이 있고 또 동시에 없다? (1)
서동철
2010. 12. 8. 18:23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철학함에 있어 경험에 붙여지는 자리매김을 위한 뒷받침이라고나 할까요?)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어떤 것이 있고 또 동시에 없음이 어찌 가능한가 말이다. 이리 明若觀火하니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남보다 쪼께 더 많이 그리고 동시에 쪼께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남보다 한 발자국 더 나가 이를 모든 생각의 제일 원칙으로 내세우는 용기와 꾀를 보인다. 그의 책 '형이상학'에서 이를 '배제된 모순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아님 딴 말로 모순율이라 부르는 듯도 하다.
헌데, 모든 주장에는 그에 걸맞는 논증이 있어야 설득력을 갖출 수 있듯, 이 문장: 갑이 있고 또 동시에 없다 또한 증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한 눈에 척 봐서 당연한 문장이라 하나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갖출 건 다 갖춰야 학문의 상아탑에 정식으로 한 자리가 매겨지지나 않을까 말이다. 그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이를 어찌 증명했을까?
그는 답하기를, 이의 증명을 요구하는 대화 상대자의 대화에 대한 준비 자세와 그리고 이 대화 상대자가 위의 명제에 시비를 건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이 이 증명이 가능하다 말한다. 에? 뭐라꼬? 이 양반 바쁜 사람 잡아 놓고 실없는 소리 하나 지금? 사실 이는 증명 방법이라 보기는 뭐하고 상대방을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당함을 보이는 방법이다.
재밌지 않은가? 철수가 나가 맞는당께 하니까 영자가 그럼 증명해보이소 마 하고 받고, 이에 철수가 그리어 해볼텡께, 단지 자네가 먼저 나가 틀렸다 말해야 혀는디, 그라믄 나가 자네가 틀렸음을 증명해 버릴 것이구만 하지 않는가. 갑 = 非非 갑 이라는 말이다. 쪼께 멋있게 말해 이중 부정은 긍정이라는 단순 형식 논리를 말함이다.
나 - 갑!
너 - 非 갑!
나 - 非(非 갑)! 꼬로 갑.
그렇다고 꼭 치사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게, 갑 그 자체를 선험적으로, 형식 논리의 한계 내에서는 증명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니 말이다. 어찌 갑 = 非 갑이 가능한가 말이다. 자꾸 헛물 켜는 것 같아 쫌 뭐하다만,
허나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증명의 전제 조건으로 대화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논리적 증명의 한계에 내세울 수 있는 경험적 전제 조건이라, 재미있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그런데 보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좀 헷갈려 하는 모습을. 그의 또 다른 책 '분석론'에서 보이는 이중 인간^^ 아리스토텔레스!:
한번은 위의 그 제일 원칙을 그 어떤 매개체의 도움이 끼어들 수 없는, 한 눈에 明若觀火한 법칙이매 순수 비경험적 논리로써 그의 옳음은 가히 필연이다 주장하더니, 같은 책 한참 뒤에 가서는 어라,
"보시지요, 우리는 제일 명제를 (경험을 통한) 귀납의 방법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험적 인지 또한 우리들에게 보편타당한 것을 구성해 주지요."
바로 이 엄청 놀라운 말과 위의 그 역시 엄청 놀라운 증명 전제 조건인 서로 대화함을 종합해 보매, 모든 순수 비경험적 제일 원칙 또한 바로 경험적 행동 내지는 사실에 그 옳음의 근거를 매길 수 있다 하는 엄청 엄청 놀랍고 놀라운 서양 철학 대부의 가르침을 듣는다.
바로 우리, 경험의 존재이기도 한 피끓는 감정의 동물인 사람들을 위한 설득 작업이기 때문이리라. 아니 망말로 순수 논리로서 이러한 작업이 충분히 가능하다면 컴퓨터 지능이 어쩜 우리 살아 숨쉬는 지능보다 그 기능 면에서는 훨씬 뛰어나지 않을까 점 쳐본다.
어쩌면 우리 철학의 대숙부 아리스토텔레스께서도 이를 염두에 두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형식 논리의 그 순수성만으로는 세상사에 대해 아무 뼈다구있는 소리를 내지를 수 없는지라 우리는, 만약 우리가 이 구체적인 세상에 대해 일종의 학문적으로 뽀다구 나는 옷을 입힌 뼈다구 있는 소리를 외치고자 한다면, 어쩔수 없이 최소한 한 발만큼은 경험 속에 담가두어야할 숙명에 처해 있음을 인지하여 위의 그 '이중적 발언'을 일삼았는지도 말이다.
안 그런가?
윗글에 붙은 말섞음:
미류: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어떤 것이 있고 또 동시에 없음이 어찌 가능한가 말이다. 이리 明若觀火하니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남보다 쪼께 더 많이 그리고 동시에 쪼께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남보다 한 발자국 더 나가 이를 모든 생각의 제일 원칙으로 내세우는 용기와 꾀를 보인다. 그의 책 '형이상학'에서 이를 '배제된 모순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아님 딴 말로 모순율이라 부르는 듯도 하다.
헌데, 모든 주장에는 그에 걸맞는 논증이 있어야 설득력을 갖출 수 있듯, 이 문장: 갑이 있고 또 동시에 없다 또한 증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한 눈에 척 봐서 당연한 문장이라 하나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갖출 건 다 갖춰야 학문의 상아탑에 정식으로 한 자리가 매겨지지나 않을까 말이다. 그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이를 어찌 증명했을까?
그는 답하기를, 이의 증명을 요구하는 대화 상대자의 대화에 대한 준비 자세와 그리고 이 대화 상대자가 위의 명제에 시비를 건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이 이 증명이 가능하다 말한다. 에? 뭐라꼬? 이 양반 바쁜 사람 잡아 놓고 실없는 소리 하나 지금? 사실 이는 증명 방법이라 보기는 뭐하고 상대방을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당함을 보이는 방법이다.
재밌지 않은가? 철수가 나가 맞는당께 하니까 영자가 그럼 증명해보이소 마 하고 받고, 이에 철수가 그리어 해볼텡께, 단지 자네가 먼저 나가 틀렸다 말해야 혀는디, 그라믄 나가 자네가 틀렸음을 증명해 버릴 것이구만 하지 않는가. 갑 = 非非 갑 이라는 말이다. 쪼께 멋있게 말해 이중 부정은 긍정이라는 단순 형식 논리를 말함이다.
나 - 갑!
너 - 非 갑!
나 - 非(非 갑)! 꼬로 갑.
그렇다고 꼭 치사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게, 갑 그 자체를 선험적으로, 형식 논리의 한계 내에서는 증명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니 말이다. 어찌 갑 = 非 갑이 가능한가 말이다. 자꾸 헛물 켜는 것 같아 쫌 뭐하다만,
허나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증명의 전제 조건으로 대화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논리적 증명의 한계에 내세울 수 있는 경험적 전제 조건이라, 재미있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그런데 보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좀 헷갈려 하는 모습을. 그의 또 다른 책 '분석론'에서 보이는 이중 인간^^ 아리스토텔레스!:
한번은 위의 그 제일 원칙을 그 어떤 매개체의 도움이 끼어들 수 없는, 한 눈에 明若觀火한 법칙이매 순수 비경험적 논리로써 그의 옳음은 가히 필연이다 주장하더니, 같은 책 한참 뒤에 가서는 어라,
"보시지요, 우리는 제일 명제를 (경험을 통한) 귀납의 방법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험적 인지 또한 우리들에게 보편타당한 것을 구성해 주지요."
바로 이 엄청 놀라운 말과 위의 그 역시 엄청 놀라운 증명 전제 조건인 서로 대화함을 종합해 보매, 모든 순수 비경험적 제일 원칙 또한 바로 경험적 행동 내지는 사실에 그 옳음의 근거를 매길 수 있다 하는 엄청 엄청 놀랍고 놀라운 서양 철학 대부의 가르침을 듣는다.
바로 우리, 경험의 존재이기도 한 피끓는 감정의 동물인 사람들을 위한 설득 작업이기 때문이리라. 아니 망말로 순수 논리로서 이러한 작업이 충분히 가능하다면 컴퓨터 지능이 어쩜 우리 살아 숨쉬는 지능보다 그 기능 면에서는 훨씬 뛰어나지 않을까 점 쳐본다.
어쩌면 우리 철학의 대숙부 아리스토텔레스께서도 이를 염두에 두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형식 논리의 그 순수성만으로는 세상사에 대해 아무 뼈다구있는 소리를 내지를 수 없는지라 우리는, 만약 우리가 이 구체적인 세상에 대해 일종의 학문적으로 뽀다구 나는 옷을 입힌 뼈다구 있는 소리를 외치고자 한다면, 어쩔수 없이 최소한 한 발만큼은 경험 속에 담가두어야할 숙명에 처해 있음을 인지하여 위의 그 '이중적 발언'을 일삼았는지도 말이다.
안 그런가?
윗글에 붙은 말섞음:
미류:
"모든 순수 비경험적 제일 원칙 또한 바로 경험적 행동 내지는 사실에 그 옳음의 근거를 매길 수 있다"
"그러니까 형식 논리의 그 순수성만으로는 세상사에 대해 아무 뼈다구있는 소리를 내지를 수 없는지라 우리는, 만약 우리가 이 구체적인 세상에 대해 일종의 학문적으로 뽀다구 나는 옷을 입힌 뼈다구 있는 소리를 외치고자 한다면, 어쩔수 없이 최소한 한 발만큼은 경험 속에 담가두어야할 숙명에 처해 있음을 인지하여 위의 그 '이중적 발언'을 일삼았는지도 말이다."
그렇다!
무슨 이야기를 더 엮어보겠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생각해 본 건데요..
"나는 생각한다 함은 모든 나의 심상들을 동반할 수 있어야 한다".있잖아요..
'심상들'이라고 하는 게 진리에 가까운 표현이겠지만
수하시진 님의 '모든 생각들'이 칸트가 원하는 칸트식 해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칸트는 인간적으로 매력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두 번의 만남으로 벌써 굳어지고 있습니다. 음..
서동철:
미류/ 만약 님이 저를 버리고 수하시진을 더 좋아 하신다면, ^^*
위에 문구가 이리 돼버려요:
"나는 생각한다 함은 모든 나의 생각들을 동반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생각'이라는 말에 너무 많은 압박을 가하게 되는 게죠.
오히려 앞의 '나는 생각한다 함'의 그 '생각'과 차이를 두는 번역을 해야 옳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실 칸트의 원문 역시 분명한 차이를 두고 있고요.
그럼 쪼께 더 나가 어떤 차이?
어찌 보면 사소한 차이는 아니라 보여요. 제 식으로 말씀드리면 앞의 '생각'이 전체 인식 과정에 있어서의 >>형식<<적인 면을 대표한다 한다면, 뒤의 '심상들'은 >>물질<<적인 면을 대표한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잡다한 여러 물건들을 하나로 꿸 때, 이에 필요한 실이 그 '생각함'이라면 이 실에 꿰어지는 것들은 '심상들'이다 뭐 이런 식의 말씀입니다.
칸트의 인간적인 면이라..., 매일 점심 식사 때 항시 몇몇 친구들을 초대했다 하는데, 이 때 이 양반 농담도 곧잘 했다 하더군요. 덧붙여 금기 사항이 하나 있어다 해요: 철학 얘기 하면 혼났다 하는군요.
암튼 제가 말씀 드린 선험적 연역법의 그 문장들은, 감히 말씀드리는데, 전 문장들은 빨면 빨수록 단물이 쭉쭉 빠지는 그런 철학사의 보배입니다. 그래 제가 외우고자 했던 바는 디립다 옛날 국민교육 헌장 외우듯한 그런 생각에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에 있든 이 단물을 빨고 만끽하고자 해서였죠.
어이쿠, 벌써 여섯시가 넘었네요. 나 조깅 가요.
미류:
네.. 그러니까 저도 심상들이 좋다고요.. --;
그게 맞는 말인데요..
그러니깐 칸트도 님처럼 거기다 '심상'의 느낌으로 말했던 것일까..하는 거거든요.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요..
아, 이거 괜히 말 꺼냈군.. --;
지난번의 그 바움가르텐의 미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글을 읽고나니 그가 꽤 몰감성이라는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그런 사람은 대개 심상들을 동반해서 생각하지 않거든요..
바움가르텐의 미학에 대한 정의
['미학'이라는 명칭은 18세기 중엽에 바움가르텐의 저작 'aesthetica'(1, 1750/2, 1758)에서 연원되었다. 이 말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리스어의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감각)에서 유래된 것인데, 바움가르텐은 미에 관한 학문을 '감성적 인식의 학'이라 규정했다. 그에 의하면 미적 표상은 감성적이기 때문에 이성적 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논리학과 동등한 차원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성에 대한 감성, 이성적 인식인 논리학에 대한 감성적 인식인 미학의 독립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미학이 어떻게 감성적 '인식'일 수 있는가 하는 칸트의 비판이 여기에 가해졌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의 바움가르텐 비판
[독일인은 다른 국민이 취미의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금 미학이라는 말로 사용하는 유일한 국민이다. 그것은 미의 비판적 판정을 이성 원리 속에 넣어 그 규칙을 학문에까지 높이려는 탁월한 분석가 바움가르텐의 '그릇된 희망'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노력은 무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규칙 또는 규준들은 그것의 가장 중요한 원천에서 보면 단순히 경험적이고, 결코 취미에 관한 우리의 판단이 그것에 따라 방향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정한 선천적 법칙일 수 없고, 오히려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 같은 규칙의 정당성에 대해 본래의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고작 '취미의 비판'이라고 하잖아요..
맙소사! 저는 그가 정말 싫어요.
그는 예술을 취미정도로 평가하는 평범보다 조금 밑에서 생각하고 있는 사람 아닌가 말이에요.
그는 '선험'이라는 말을 혹시 했을지 모르지만 '선험'을 느끼지는 못한 사람이에요.
그런 그가 모든 '심상'을 동반해서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았을까요?
네.. 잘 다녀오세요..
저도 인제 자야겠습니다.
피곤하네요.. ^^
서동철:
조깅 갔다 와서 설겆이 하고, 오늘은 딸아이 저녁상까지 차리고, 빨래 걷어 정리해 넣어 놨지요. 님하고의 실시간 대화가 해와 달이니 사뭇 아쉽네요.
칸트의 두 개념들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1. 심상
이는 우리 인간 인식의 기초 물질입니다. 의식 외부의 대상들을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 들인 후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습들을 가리키죠. 우리말로 상상 내지는 표상으로도 번역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님은 심상을 이와는 조금 다른, 허나 님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해석하시는 듯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심상'이라 할 때의 그 의미를 계속 염두에 두시니 말이죠. 더군다나 님의 그 섬세한 언어 감각으로.
제가 이를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 번역되느 '표상'보다 선호한 이유는 심상의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을 그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표상이라는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말보다는 그래도 종종 쓰는 심상이란 말이 제 감각에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2. 미학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미학'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그 미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님이 위에 든 바움가르텐이 사용한 그 의미에 가깝다 봐야 할겝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칸트의 미학은 칸트의 소위 제 3비판 일명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에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님이 싫다는 칸트의 그 '미학'은 엄격히 말해 인식의 감성적 부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죠.
덧붙여 말씀하시는 '취미의 비판' 운운은 오히려 바움가르텐을 욕하셔야 공평하지 않나 생각되는군요. 칸트는 그때까지의 상황을 단순 서술하고 있으니 말이죠.
어쨌든 칸트는 이 부분, 자신의 인식론적 기반을 다지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초반에 다루는 이러한 인식의 감성적 부분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그 주를 이루죠)에 대해 나름대로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만큼 노력을 많이 들였고 그 양반 스스로 어느 정도 만족하는 부분이었다 보입니다.
건강하시고요,
우리 또 봅니다.
미류:
미류의 하루는 그 끝이 늦어서 대개 열 시나 열한 시에야 저녁을 먹습니다.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엄마가 밥 먹고 있는 미류에게 완두콩 까기 숙제를 내주어서 미류는 네..하고 숙제를 다 마쳤습니다.
자식에게서 얻으리라 여겼던 평범한 기쁨을 엄마에게서 빼앗은 미류는 다른 삶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자주 순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생각이란 전존재의 몰입, 몸의 모든 감각이 조밀한 한 공간에서 철저하게 녹아 얽힌 채로 운동하는 상태인데, 생각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질 때만이 '모든 심상을 동반'하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했던 겁니다.
그런데 칸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 자신은 대상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고요하게 주시합니다.
그것도 몰입은 몰입인데 열에 들떠 대상과 하나로 녹아버리는 게 아니라 사뭇 냉철하게 관조하는 인상을 줍니다.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마 제가 '심상'을 잘 못 이해한 것 같습니다.
미류는 미류판 '모든 심상이 동반'되는 한 벌의 과정을 심장과 뇌를 사용한 활동을 할 때 그 위에 겹쳐 놓습니다.
순차적으로 하나 하나 정교하게 진행하는 게 아니라 이를테면 이미지 대 이미지로 순간적으로 대조하며 어긋나는 점과 일치하는 지점을 발견해 거머리처럼 들러붙든지 멀리 뱉어버리든지 합니다.
저는 칸트의 그 글을 그가 예술을 향유하는 태도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읽었습니다.
제 관심사는 오로지 그것이니까요..
둘 사이에 미학 개념에 대한 공통의 기초가 우선 놓여져야 다음 이야기로 전개가 될 텐데 그들이 사용한 개념이 다르다면 비판이든 뭐든 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닐까요?
칸트의 말은 바움가르텐의 미학을 겨냥하는 선상에 있으니 바움가르텐의 미학에 대한 규정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칸트의 미학 이해도 드러나겠지요.
바움가르텐은 미학을 '감성'적 '인식'의 학.이라고 말하였지요.
칸트는 여기서 '인식'을 문제 삼았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감성'만 미학으로 떼어 놓은 것이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예술은 감성만이 아니라 감성과 인식이 반드시 함께 작용할 때 가능합니다.
바움가르텐이 말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것 아닙니까?
[결코 취미에 관한 우리의 판단이 그것에 따라 방향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정한 선천적 법칙일 수 없고, 오히려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 같은 규칙의 정당성에 대해 본래의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취미판단'이라고 말할 때 단순 서술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긍정적, 적극적으로 끌어다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요?
[칸트는 그의 '판단력 비판'에서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의 문제는 오성에 의한 인식관계가 아니고, 주관으로 끌어가는 상상력에 의한 '쾌.불쾌의 감정'이라고 하여 실질적인 의미에서 미학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걸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결국 바움가르텐과 칸트가 같은 걸 다른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 님도 평안하시고요.. 후에 뵙겠습니다.
전력질주의 시기가 도래하였습니다. ^^
사실 요즘 제 마음이 좀 허랑합니다.
갈피를 못 잡고 울 것 같다 웃을 것 같다 둥둥 떠다니고 있씸다.
아무래도 봄병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은데요.. 딱딱한 문장들을 잡고 있으면 그래도 기력이 쪼매 살아납니다. 히히..
친절하게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굴하지 않으며 나의 선생님에게 깡패 미류..
서동철:
이번에 주신 님의 전반부 말씀에 대해서는 저 역시 곱씹어보고 싶다는 말씀을 우선 드립니다.
사실 이미 그 당시 칸트 때 님과 비슷한 비판이 칸트에 가해졌습니다. 그것도 그 당시에 꽤나, 아니 오히려 칸트보다 더 명망이 높았던 몇몇 철학자들한테서 말이죠. 이 양반은 '모든 것을 세밀히 가루로 부수어 버린다'는 비판을 했죠.
단지 그럼에도 불구 제가 칸트를 변호하고자 한다면,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비판 철학이라 부르며 인간의 제반 인식 능력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자 함에 준해 '가루로 부수어' 버렸으며, 나아가 이를 다시 종합하는 사고 역시 제시했습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왜 그 양반이 그렇게 부수기를 좋아했느지 필요하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미학'이라는 용어에 대해.
우선 바움가르텐의 이 용어는,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예술 철학과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양반은 사실 자신의 그 글을 발표하며 자기 스승 볼프의 철학을 보강한다는 의미에서 논리적 인식의 틀에 감정적 인식의 틀을 첨가하고자 했던 의도였습니다. 미라는 개념은 이러한 감성적 인식의 완전한 상태를 말할 따름이었고요.
이는 허나 우리가 통상 미학에서 다루는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우리 인간 미적 느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되어 칸트는 자신의 소위 선험적 감성론에서 이 '미학'이란 용어를 빌려온 게죠. 동시에 바움가르텐을 그러한 맥락에서 인용하고요.
칸트의 진짜 미학, 즉 판단력 비판에 대한 님의 인용문 중에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이 빠져 있군요: 다시 돌아봄, 반성, 곱씹어봄이라는 개념 말입니다. 시간 되시면 이에 눈길을 돌려 보셨으면...
(아 참, 이 책에선 칸트는 바움가르텐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그 말 - 심상.
문자 그대로 옮기면, 동사적 표현으로, 무엇인가를 앞에 놓는다 하는 뜻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저서 '표상과 의지의 세계'에서 그 표상 또한 이의 명사형이죠.
근데 이 개념은 최소한 독일 고전 철학에 있어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이를 철학의 시초로 삼자는 칸트의 제자도 등장하는 등, 어찌 보면 이 개념의 철학적 탐구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유명한 독일 관념론이 탄생할 수 있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덧붙여 님의 그 언어적 고민, 충분히 정당합니다. 아니 저 역시 당연히 해야 될 고민이지요. 제가 사랑하는 고민이기도 하고요.
저는 무엇을 하든 그에 대한 저의 마지막 입장을 표명할 때 항시 제 느낌에 대고 물어봅니다:
"내 느낌아, 너는 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말입니다.
이게 저와 저의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끊어지지 않게 이어 주는 끈, 그래 매우 귀중한 끈이죠.
우리 또 봅니다.
"그러니까 형식 논리의 그 순수성만으로는 세상사에 대해 아무 뼈다구있는 소리를 내지를 수 없는지라 우리는, 만약 우리가 이 구체적인 세상에 대해 일종의 학문적으로 뽀다구 나는 옷을 입힌 뼈다구 있는 소리를 외치고자 한다면, 어쩔수 없이 최소한 한 발만큼은 경험 속에 담가두어야할 숙명에 처해 있음을 인지하여 위의 그 '이중적 발언'을 일삼았는지도 말이다."
그렇다!
무슨 이야기를 더 엮어보겠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생각해 본 건데요..
"나는 생각한다 함은 모든 나의 심상들을 동반할 수 있어야 한다".있잖아요..
'심상들'이라고 하는 게 진리에 가까운 표현이겠지만
수하시진 님의 '모든 생각들'이 칸트가 원하는 칸트식 해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칸트는 인간적으로 매력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두 번의 만남으로 벌써 굳어지고 있습니다. 음..
서동철:
미류/ 만약 님이 저를 버리고 수하시진을 더 좋아 하신다면, ^^*
위에 문구가 이리 돼버려요:
"나는 생각한다 함은 모든 나의 생각들을 동반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생각'이라는 말에 너무 많은 압박을 가하게 되는 게죠.
오히려 앞의 '나는 생각한다 함'의 그 '생각'과 차이를 두는 번역을 해야 옳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실 칸트의 원문 역시 분명한 차이를 두고 있고요.
그럼 쪼께 더 나가 어떤 차이?
어찌 보면 사소한 차이는 아니라 보여요. 제 식으로 말씀드리면 앞의 '생각'이 전체 인식 과정에 있어서의 >>형식<<적인 면을 대표한다 한다면, 뒤의 '심상들'은 >>물질<<적인 면을 대표한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잡다한 여러 물건들을 하나로 꿸 때, 이에 필요한 실이 그 '생각함'이라면 이 실에 꿰어지는 것들은 '심상들'이다 뭐 이런 식의 말씀입니다.
칸트의 인간적인 면이라..., 매일 점심 식사 때 항시 몇몇 친구들을 초대했다 하는데, 이 때 이 양반 농담도 곧잘 했다 하더군요. 덧붙여 금기 사항이 하나 있어다 해요: 철학 얘기 하면 혼났다 하는군요.
암튼 제가 말씀 드린 선험적 연역법의 그 문장들은, 감히 말씀드리는데, 전 문장들은 빨면 빨수록 단물이 쭉쭉 빠지는 그런 철학사의 보배입니다. 그래 제가 외우고자 했던 바는 디립다 옛날 국민교육 헌장 외우듯한 그런 생각에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에 있든 이 단물을 빨고 만끽하고자 해서였죠.
어이쿠, 벌써 여섯시가 넘었네요. 나 조깅 가요.
미류:
네.. 그러니까 저도 심상들이 좋다고요.. --;
그게 맞는 말인데요..
그러니깐 칸트도 님처럼 거기다 '심상'의 느낌으로 말했던 것일까..하는 거거든요.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요..
아, 이거 괜히 말 꺼냈군.. --;
지난번의 그 바움가르텐의 미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글을 읽고나니 그가 꽤 몰감성이라는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그런 사람은 대개 심상들을 동반해서 생각하지 않거든요..
바움가르텐의 미학에 대한 정의
['미학'이라는 명칭은 18세기 중엽에 바움가르텐의 저작 'aesthetica'(1, 1750/2, 1758)에서 연원되었다. 이 말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리스어의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감각)에서 유래된 것인데, 바움가르텐은 미에 관한 학문을 '감성적 인식의 학'이라 규정했다. 그에 의하면 미적 표상은 감성적이기 때문에 이성적 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논리학과 동등한 차원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성에 대한 감성, 이성적 인식인 논리학에 대한 감성적 인식인 미학의 독립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미학이 어떻게 감성적 '인식'일 수 있는가 하는 칸트의 비판이 여기에 가해졌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의 바움가르텐 비판
[독일인은 다른 국민이 취미의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금 미학이라는 말로 사용하는 유일한 국민이다. 그것은 미의 비판적 판정을 이성 원리 속에 넣어 그 규칙을 학문에까지 높이려는 탁월한 분석가 바움가르텐의 '그릇된 희망'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노력은 무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규칙 또는 규준들은 그것의 가장 중요한 원천에서 보면 단순히 경험적이고, 결코 취미에 관한 우리의 판단이 그것에 따라 방향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정한 선천적 법칙일 수 없고, 오히려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 같은 규칙의 정당성에 대해 본래의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고작 '취미의 비판'이라고 하잖아요..
맙소사! 저는 그가 정말 싫어요.
그는 예술을 취미정도로 평가하는 평범보다 조금 밑에서 생각하고 있는 사람 아닌가 말이에요.
그는 '선험'이라는 말을 혹시 했을지 모르지만 '선험'을 느끼지는 못한 사람이에요.
그런 그가 모든 '심상'을 동반해서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았을까요?
네.. 잘 다녀오세요..
저도 인제 자야겠습니다.
피곤하네요.. ^^
서동철:
조깅 갔다 와서 설겆이 하고, 오늘은 딸아이 저녁상까지 차리고, 빨래 걷어 정리해 넣어 놨지요. 님하고의 실시간 대화가 해와 달이니 사뭇 아쉽네요.
칸트의 두 개념들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1. 심상
이는 우리 인간 인식의 기초 물질입니다. 의식 외부의 대상들을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 들인 후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습들을 가리키죠. 우리말로 상상 내지는 표상으로도 번역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님은 심상을 이와는 조금 다른, 허나 님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해석하시는 듯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심상'이라 할 때의 그 의미를 계속 염두에 두시니 말이죠. 더군다나 님의 그 섬세한 언어 감각으로.
제가 이를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 번역되느 '표상'보다 선호한 이유는 심상의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을 그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표상이라는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말보다는 그래도 종종 쓰는 심상이란 말이 제 감각에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2. 미학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미학'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그 미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님이 위에 든 바움가르텐이 사용한 그 의미에 가깝다 봐야 할겝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칸트의 미학은 칸트의 소위 제 3비판 일명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에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님이 싫다는 칸트의 그 '미학'은 엄격히 말해 인식의 감성적 부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죠.
덧붙여 말씀하시는 '취미의 비판' 운운은 오히려 바움가르텐을 욕하셔야 공평하지 않나 생각되는군요. 칸트는 그때까지의 상황을 단순 서술하고 있으니 말이죠.
어쨌든 칸트는 이 부분, 자신의 인식론적 기반을 다지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초반에 다루는 이러한 인식의 감성적 부분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그 주를 이루죠)에 대해 나름대로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만큼 노력을 많이 들였고 그 양반 스스로 어느 정도 만족하는 부분이었다 보입니다.
건강하시고요,
우리 또 봅니다.
미류:
미류의 하루는 그 끝이 늦어서 대개 열 시나 열한 시에야 저녁을 먹습니다.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엄마가 밥 먹고 있는 미류에게 완두콩 까기 숙제를 내주어서 미류는 네..하고 숙제를 다 마쳤습니다.
자식에게서 얻으리라 여겼던 평범한 기쁨을 엄마에게서 빼앗은 미류는 다른 삶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자주 순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생각이란 전존재의 몰입, 몸의 모든 감각이 조밀한 한 공간에서 철저하게 녹아 얽힌 채로 운동하는 상태인데, 생각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질 때만이 '모든 심상을 동반'하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했던 겁니다.
그런데 칸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 자신은 대상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고요하게 주시합니다.
그것도 몰입은 몰입인데 열에 들떠 대상과 하나로 녹아버리는 게 아니라 사뭇 냉철하게 관조하는 인상을 줍니다.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마 제가 '심상'을 잘 못 이해한 것 같습니다.
미류는 미류판 '모든 심상이 동반'되는 한 벌의 과정을 심장과 뇌를 사용한 활동을 할 때 그 위에 겹쳐 놓습니다.
순차적으로 하나 하나 정교하게 진행하는 게 아니라 이를테면 이미지 대 이미지로 순간적으로 대조하며 어긋나는 점과 일치하는 지점을 발견해 거머리처럼 들러붙든지 멀리 뱉어버리든지 합니다.
저는 칸트의 그 글을 그가 예술을 향유하는 태도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읽었습니다.
제 관심사는 오로지 그것이니까요..
둘 사이에 미학 개념에 대한 공통의 기초가 우선 놓여져야 다음 이야기로 전개가 될 텐데 그들이 사용한 개념이 다르다면 비판이든 뭐든 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닐까요?
칸트의 말은 바움가르텐의 미학을 겨냥하는 선상에 있으니 바움가르텐의 미학에 대한 규정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칸트의 미학 이해도 드러나겠지요.
바움가르텐은 미학을 '감성'적 '인식'의 학.이라고 말하였지요.
칸트는 여기서 '인식'을 문제 삼았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감성'만 미학으로 떼어 놓은 것이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예술은 감성만이 아니라 감성과 인식이 반드시 함께 작용할 때 가능합니다.
바움가르텐이 말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것 아닙니까?
[결코 취미에 관한 우리의 판단이 그것에 따라 방향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정한 선천적 법칙일 수 없고, 오히려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 같은 규칙의 정당성에 대해 본래의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취미판단'이라고 말할 때 단순 서술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긍정적, 적극적으로 끌어다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요?
[칸트는 그의 '판단력 비판'에서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의 문제는 오성에 의한 인식관계가 아니고, 주관으로 끌어가는 상상력에 의한 '쾌.불쾌의 감정'이라고 하여 실질적인 의미에서 미학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걸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결국 바움가르텐과 칸트가 같은 걸 다른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 님도 평안하시고요.. 후에 뵙겠습니다.
전력질주의 시기가 도래하였습니다. ^^
사실 요즘 제 마음이 좀 허랑합니다.
갈피를 못 잡고 울 것 같다 웃을 것 같다 둥둥 떠다니고 있씸다.
아무래도 봄병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은데요.. 딱딱한 문장들을 잡고 있으면 그래도 기력이 쪼매 살아납니다. 히히..
친절하게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굴하지 않으며 나의 선생님에게 깡패 미류..
서동철:
이번에 주신 님의 전반부 말씀에 대해서는 저 역시 곱씹어보고 싶다는 말씀을 우선 드립니다.
사실 이미 그 당시 칸트 때 님과 비슷한 비판이 칸트에 가해졌습니다. 그것도 그 당시에 꽤나, 아니 오히려 칸트보다 더 명망이 높았던 몇몇 철학자들한테서 말이죠. 이 양반은 '모든 것을 세밀히 가루로 부수어 버린다'는 비판을 했죠.
단지 그럼에도 불구 제가 칸트를 변호하고자 한다면,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비판 철학이라 부르며 인간의 제반 인식 능력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자 함에 준해 '가루로 부수어' 버렸으며, 나아가 이를 다시 종합하는 사고 역시 제시했습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왜 그 양반이 그렇게 부수기를 좋아했느지 필요하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미학'이라는 용어에 대해.
우선 바움가르텐의 이 용어는,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예술 철학과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양반은 사실 자신의 그 글을 발표하며 자기 스승 볼프의 철학을 보강한다는 의미에서 논리적 인식의 틀에 감정적 인식의 틀을 첨가하고자 했던 의도였습니다. 미라는 개념은 이러한 감성적 인식의 완전한 상태를 말할 따름이었고요.
이는 허나 우리가 통상 미학에서 다루는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우리 인간 미적 느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되어 칸트는 자신의 소위 선험적 감성론에서 이 '미학'이란 용어를 빌려온 게죠. 동시에 바움가르텐을 그러한 맥락에서 인용하고요.
칸트의 진짜 미학, 즉 판단력 비판에 대한 님의 인용문 중에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이 빠져 있군요: 다시 돌아봄, 반성, 곱씹어봄이라는 개념 말입니다. 시간 되시면 이에 눈길을 돌려 보셨으면...
(아 참, 이 책에선 칸트는 바움가르텐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그 말 - 심상.
문자 그대로 옮기면, 동사적 표현으로, 무엇인가를 앞에 놓는다 하는 뜻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저서 '표상과 의지의 세계'에서 그 표상 또한 이의 명사형이죠.
근데 이 개념은 최소한 독일 고전 철학에 있어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이를 철학의 시초로 삼자는 칸트의 제자도 등장하는 등, 어찌 보면 이 개념의 철학적 탐구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유명한 독일 관념론이 탄생할 수 있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덧붙여 님의 그 언어적 고민, 충분히 정당합니다. 아니 저 역시 당연히 해야 될 고민이지요. 제가 사랑하는 고민이기도 하고요.
저는 무엇을 하든 그에 대한 저의 마지막 입장을 표명할 때 항시 제 느낌에 대고 물어봅니다:
"내 느낌아, 너는 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말입니다.
이게 저와 저의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끊어지지 않게 이어 주는 끈, 그래 매우 귀중한 끈이죠.
우리 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