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르침
선(禪)에 대해서는 내 보기에 많이들 말씀 나누시는 듯한데 정작 붓다에 대해서는 거의 이 나눔과 오고감이 없는 듯 합니다. 꼭 이 오고감이 있어야 된다, 그래야 불교가 제대로 된 불교다 하는 주장을 감히 펴고자 하는 바는 아니고, 단지 붓다를 모셔 놓은 법당 안에서 붓다에 삼천배 나아가 만배를 올리며 공경하는 자리에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없이 이런 의식을 행함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씀 드립니다. 이 점만큼은 저 확신하고 있습니다.
선은 깨달음 즉 각(覺)이다 하매 만약 불교에서 이를 말한다면 이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이라 보고 싶습니다. 불(佛) 역시 궁극적으론 깨달음이라는 뜻이지요. 불립문자(不立文字)다 주장하며 모든 문자로 된 기록을 무시해도 된다 함은 결국 자가당착에 빠지는 큰 위험에 빠지는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그 문자에 얽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라 하는 경고의 소리일 뿐 아예 무시해 버리라 하는 혁명적 발언은 절대 아니라 봅니다. 그리 되면 옳음을 잃지요.
이럴진대 우리의 불교 공부는 보다 더 정확히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이 보다 더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는 문자의 공부가 선행되어야겠지요. 최소한 그러한 문자로부터 직접 번역한 번역본의 공부 말입니다.
예를 듭니다.
금강경 첫 부분에서 접하는 붓다의 가르침을 우리는 통상 중국 고승 구마라습이 번역한 문자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허나 산스끄리뜨 원본을 가만 들여다 보면 끄트머리에 구마라습이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빠뜨린 문구를 발견합니다. 그 중 일부를 옮깁니다:
“가부좌를 결하고, 곧게 몸을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시고서”
이에 등장하는 ‘마음챙김’은 원어로는 sati, 통상 정념(正念)으로 번역되어 알려져 있는 개념인데, 불가의 수행에 있어 핵심적 개념이지요. 그런데 이 가르침이 소위 대승에서는 화두선이라는 기술에 그리고 소위 소승에서는 위빠사나라는 기술에 밀려 그 중요성이 평가 절하되어 나타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럼 이 마음챙김이란 과연 무엇인가? 수행의 시각으로 바라보아 묻는다면 이 마음챙김의 수행에 있어 그 구체적인 모습은 어찌 보일까 하고 묻습니다. 아주 짧게 말씀드리자면 이는 붓다가 선정과 고행 수행 뒤 얻은 최후의 결정적인 수행 방법이며 곧 정좌후 좌선을 뜻합니다.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론 이게 바로 붓다가 안반수의경에서 가르치는 호흡을 통한 수행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독일의 불교학자 Schumann은 이를 systematische Meditation 즉 체계적 명상이라 말하며 그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처음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를 다시 한번 두 손 모아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