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방
쉴러 - 아름다움(II)
서동철
2010. 9. 13. 16:54
첫째 가름: 쉴러의 개념 ‘아름다움'을 이해함에 따른 어려움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이것이다 하는 간단명료한 답을 던질 수도 있겠다만, 그 던지는 내용에 어느 정도 보편타당성을 붙이기 위해서라면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가 무엇이 아름답다는 말을 할 때 이러한 판단의 내적 구조를 까발려 보는 게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이란 개념이 서술어로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특정 주어에 붙여지는가를 꼼꼼히 살펴보는 일을 하는 게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철학적 탐구를 칸트가 자신의 세번째 비판서로서 세상에 내놓은 판단력비판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앞부분에서.
쉴러는 허나 자신의 예술적 성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칸트의 이러한 철학적 한마당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자신이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을 칸트가 제시한 철학적 원칙에 비추어 펼쳐 보았다는 헤겔의 쉴러에 대한 촌평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는 허나 동시에 그가 이러한 칸트의 철학적 가르침에 힘입어 아름다움이란 개념 속으로 보다 더 깊숙히 들어갈 수 있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더불어 그가 예술가로서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능력과 의무를 띄고 있을 뿐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모습을 상기한다면 그가 제안한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 어떠한 방법으로 다가섬이 제대로된 모습인지 엿볼 수 있다;
칸트가 제시한 미학적 판단의 내적구조를 파악하는 방법 말고 쉴러가 나름대로 내놓은 미학적 교육이란 틀에 맞추어 그 개념에 접근하는 게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을 가르치는 미학적 교육이 바로 이 사람을 어찌 변화시키는가, 이러한 교육이 사람들에게 행해진다면 그들은 과연 그 이전과 어떠한 면에서 달라지는가 등의 질문들에 걸맞는 답을 조심스럽게 찾아봄으로써 그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이란 개념에 대한 이해를 얻자는 속셈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이것이다 하는 간단명료한 답을 던질 수도 있겠다만, 그 던지는 내용에 어느 정도 보편타당성을 붙이기 위해서라면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가 무엇이 아름답다는 말을 할 때 이러한 판단의 내적 구조를 까발려 보는 게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이란 개념이 서술어로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특정 주어에 붙여지는가를 꼼꼼히 살펴보는 일을 하는 게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철학적 탐구를 칸트가 자신의 세번째 비판서로서 세상에 내놓은 판단력비판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앞부분에서.
쉴러는 허나 자신의 예술적 성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칸트의 이러한 철학적 한마당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자신이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을 칸트가 제시한 철학적 원칙에 비추어 펼쳐 보았다는 헤겔의 쉴러에 대한 촌평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는 허나 동시에 그가 이러한 칸트의 철학적 가르침에 힘입어 아름다움이란 개념 속으로 보다 더 깊숙히 들어갈 수 있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더불어 그가 예술가로서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능력과 의무를 띄고 있을 뿐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모습을 상기한다면 그가 제안한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 어떠한 방법으로 다가섬이 제대로된 모습인지 엿볼 수 있다;
칸트가 제시한 미학적 판단의 내적구조를 파악하는 방법 말고 쉴러가 나름대로 내놓은 미학적 교육이란 틀에 맞추어 그 개념에 접근하는 게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을 가르치는 미학적 교육이 바로 이 사람을 어찌 변화시키는가, 이러한 교육이 사람들에게 행해진다면 그들은 과연 그 이전과 어떠한 면에서 달라지는가 등의 질문들에 걸맞는 답을 조심스럽게 찾아봄으로써 그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이란 개념에 대한 이해를 얻자는 속셈이다.
허나 물론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가 근본적으로 사람을 어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사람이란 도데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쉴러가 어떠한 답을 던지고 있는가를 우선 알아보자는 말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질문이 좀 그렇긴 하다. 일단 던져놓고 봐도 그 황당함을 치우기 힘들다. 시간과 장소, 또한 개인의 경험과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게다. 허나 까짓 어떠랴, 쉴러가 이에 대해 어떠한 대답을 던졌는가를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고리타분한 내용이긴 하나 그래도 글의 전개에 필요한 몫을 해내기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말을 끈다. 사람이란, 간단히 말해, 원천적으로 모순된 존재라고 그는 말한다. 두 가지 원천적으로 이질적인 덩어리들이 한 뭉치를 이루니 그렇다: 감성과 이성. 우리말로 몸과 마음이라고 할까, 육체와 정신이라 해도 괜찮고. 문제는 사람이라는 뭉치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게다. 그렇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 된다. 몸과 마음이 전혀 따로 노니 그렇다. 나이가 들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경우 또한 이와 엇비슷한 경우지 싶다. 그래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이 한데 어울려 조화스런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적지 아니 시도되고 있었다. 서양철학사에서 흔히 엿듣는 육-혼의 문제가 이를 대변한다. 더불어 고대 이후 유럽사상사에서 끊임없이 이 두 영역을 서로 잇고자 한 흔적을 어렵지 않게 본다. 둘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꾸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룸을 최소한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시도였다.
잠깐 옆길로 샌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민을 한 흔적이 있다. 전통 선가를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북쪽에서 내리보아 두 부류로 나누어 좌방과 우방으로 부르는 바, 좌방선가에서는 몸을 통해 마음으로 이어지는 수행길에 들어가며 참사람됨을 이루고자 했으며 우방선가에선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그 반대길을 걷고자 했다. 예컨대 괴력을 뽐내는 차력사들은 좌방의 아류이며 조선시대 기득권층의 일부가 추구했던 바는 우방의 수행이었다.
쉴러에게는 물론 이러한 수행학의 전통이 없었다. 그에겐 대신 다른 나눔의 전통이 있었다. 자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를 미래에서 새로 찾느냐 아니면 과거에 놓여 있어 되찾자 외치는가 하는게다. 그는‘새로운 하나'를 만드는 일을 자신이 내놓은 미학적 교육이 해내야 할 최고 과제로 삼았다. 단지 그렇다고 원천적으로 서로 상이한 두 성질들이 이 ‘새로운 하나' 속에서 사라진다고는 보지 않고 둘 다 나름대로의 특이함을 유지하며 새로운 테두리 내에서 섞여 뭉친다는 주장이다. 달리 말해 그에 의하면 사람은 감성적 상태에서 미학적 교육을 통해 이성적 상태로 이끌어져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감성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감성이 이성에 의해 제대로 통제되고 있음을 뜻하고자 했다. 미학적 인간이란 따라서 그에게 감성적도 아니요 이성적도 아니고 감성적이고 또한 동시에 이성적인 인간을 말한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엿보고자 했다 - 자유 말이다. 감성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외부요소들에 종속되지 않고 이성을 통해 자기통제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그리니 말이다. 미학적 인간이란 따라서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그는 이러한 자유를 ‘현상의 자유'라 말하며 칸트 도덕철학의 자유와 다름을 주장하는 용기를 보인다. 감성 부분을 제외하고 이성이라는 형식적 내지는 도덕적 규칙성이라는 틀 속에서 내비칠 수 있는 자유가 칸트의 자유라 한다면 자기의 자유는 감성 부분까지 아울러 고려한 소위 ‘감성화된 자유'라 외치며 이를 자신의 미학을 통해 이론적 뒷받침을 하고자 했던 게다. 나아가 칸트의 자유 개념보다 자신의 그것이 오히려 사람 본연의 모습에 걸맞는 개념이라 여기며 감성이 도외시된‘철학자'가 아니라 감성을 어쨌거나 벗어날 수 없는‘사람'이 철학함의 주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서슴치 않는다.
아름다움이란 개념에 자유라는 개념을 연결시키며 이를 감성과 이성의 통일체로 여기고자 하는 쉴러의 미학이다. 언뜻 듣기에 그럴 듯하게 들리는 그의 말 속에 그럼 헛점 내지는 약점은 없을까? ‘현상의 자유'라는 개념에 자유가 남발되고 있는 모습을 엿본다 하면 ‘철학자'가 ‘사람'에게 내비치는 엉뚱함일까? 이를 한번 알아보자.
질문이 좀 그렇긴 하다. 일단 던져놓고 봐도 그 황당함을 치우기 힘들다. 시간과 장소, 또한 개인의 경험과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게다. 허나 까짓 어떠랴, 쉴러가 이에 대해 어떠한 대답을 던졌는가를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고리타분한 내용이긴 하나 그래도 글의 전개에 필요한 몫을 해내기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말을 끈다. 사람이란, 간단히 말해, 원천적으로 모순된 존재라고 그는 말한다. 두 가지 원천적으로 이질적인 덩어리들이 한 뭉치를 이루니 그렇다: 감성과 이성. 우리말로 몸과 마음이라고 할까, 육체와 정신이라 해도 괜찮고. 문제는 사람이라는 뭉치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게다. 그렇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 된다. 몸과 마음이 전혀 따로 노니 그렇다. 나이가 들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경우 또한 이와 엇비슷한 경우지 싶다. 그래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이 한데 어울려 조화스런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적지 아니 시도되고 있었다. 서양철학사에서 흔히 엿듣는 육-혼의 문제가 이를 대변한다. 더불어 고대 이후 유럽사상사에서 끊임없이 이 두 영역을 서로 잇고자 한 흔적을 어렵지 않게 본다. 둘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꾸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룸을 최소한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시도였다.
잠깐 옆길로 샌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민을 한 흔적이 있다. 전통 선가를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북쪽에서 내리보아 두 부류로 나누어 좌방과 우방으로 부르는 바, 좌방선가에서는 몸을 통해 마음으로 이어지는 수행길에 들어가며 참사람됨을 이루고자 했으며 우방선가에선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그 반대길을 걷고자 했다. 예컨대 괴력을 뽐내는 차력사들은 좌방의 아류이며 조선시대 기득권층의 일부가 추구했던 바는 우방의 수행이었다.
쉴러에게는 물론 이러한 수행학의 전통이 없었다. 그에겐 대신 다른 나눔의 전통이 있었다. 자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를 미래에서 새로 찾느냐 아니면 과거에 놓여 있어 되찾자 외치는가 하는게다. 그는‘새로운 하나'를 만드는 일을 자신이 내놓은 미학적 교육이 해내야 할 최고 과제로 삼았다. 단지 그렇다고 원천적으로 서로 상이한 두 성질들이 이 ‘새로운 하나' 속에서 사라진다고는 보지 않고 둘 다 나름대로의 특이함을 유지하며 새로운 테두리 내에서 섞여 뭉친다는 주장이다. 달리 말해 그에 의하면 사람은 감성적 상태에서 미학적 교육을 통해 이성적 상태로 이끌어져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감성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감성이 이성에 의해 제대로 통제되고 있음을 뜻하고자 했다. 미학적 인간이란 따라서 그에게 감성적도 아니요 이성적도 아니고 감성적이고 또한 동시에 이성적인 인간을 말한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엿보고자 했다 - 자유 말이다. 감성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외부요소들에 종속되지 않고 이성을 통해 자기통제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그리니 말이다. 미학적 인간이란 따라서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그는 이러한 자유를 ‘현상의 자유'라 말하며 칸트 도덕철학의 자유와 다름을 주장하는 용기를 보인다. 감성 부분을 제외하고 이성이라는 형식적 내지는 도덕적 규칙성이라는 틀 속에서 내비칠 수 있는 자유가 칸트의 자유라 한다면 자기의 자유는 감성 부분까지 아울러 고려한 소위 ‘감성화된 자유'라 외치며 이를 자신의 미학을 통해 이론적 뒷받침을 하고자 했던 게다. 나아가 칸트의 자유 개념보다 자신의 그것이 오히려 사람 본연의 모습에 걸맞는 개념이라 여기며 감성이 도외시된‘철학자'가 아니라 감성을 어쨌거나 벗어날 수 없는‘사람'이 철학함의 주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서슴치 않는다.
아름다움이란 개념에 자유라는 개념을 연결시키며 이를 감성과 이성의 통일체로 여기고자 하는 쉴러의 미학이다. 언뜻 듣기에 그럴 듯하게 들리는 그의 말 속에 그럼 헛점 내지는 약점은 없을까? ‘현상의 자유'라는 개념에 자유가 남발되고 있는 모습을 엿본다 하면 ‘철학자'가 ‘사람'에게 내비치는 엉뚱함일까? 이를 한번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