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이야기

Hochsailer (2793m)

서동철 2010. 9. 7. 19:41

한참 올라가 능선에 다다르면 이 신의 작품을 만끽한다. 이름하여 '악마의 구멍들'. 높이는 해발 2700미터가 넘는다. 왼쪽 밑에서부터 암벽을 타고 바른쪽 구멍을 통해 지나치는 길인데 안전자일이 설치되어 있다. 내 오를 땐 허나 눈에 덮여 쓸모 없었지만. 구멍을 지나 건너편 북쪽에 빙하가 깔려 있다. 꼭대기에는 이 빙하를 왼쪽으로 가로질러 가야 한다.  


산행 뒤 이렇게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적은 드물다. 한계에 부딪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실제 행동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며 풀어버리는 모습을 스스로에게 보여가며 줄곧 오른 산행이었다. 얼추 12시간에 걸친 산행 뒤에 내게 몰려운 몸의 피로를 내 마음에 곱게 쌓인 자부심으로 어루만질 수 있었다. 



내가 올랐던 산행길 암벽. 이 찐한 암벽의 멋을 만끽할 수 없었다. 눈에 덮혀 버렸으니, 쩝.


호흐자일러, 베르흐테스가덴 알프스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 호흐쾨니히 지역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산이다. 2793미터, 그러니까 독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밧쯔만보다 더 높은 산이다. 그 웅장한 멋이야 밧쯔만이 그래도 낫다 여긴다만. 오스트리아 힌터탈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마을이 출발지역이다. 꼭대기를 지나 한 바퀴 도는데 8시간 가량 잡았다. 북쪽으로 빙하지역이 있으나 그다지 어렵지 않고 또 그런 이유로 일부러 고른 산행이었다. 그 다음 날 할 일이 수북히 쌓여 있었으니 말이다. 두 시간 올랐을까, 높이 2000미터쯤 되는 지역에서 암벽을 타는데 눈이 쌓여 있지 않은가. 그것도 꽤 많이, 수북히. 며칠 전 알프스 지역 전반에 걸쳐 눈이 내렸다는 소리는 내 익히 들었다만 이 정도로 쌓여 있을 줄은 내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도 오르지 않는가? 눈 위에 발자국이 전혀 없으니 눈 온 뒤 아무로 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근데 그냥 평지라면 또 몰라도 가파른 암벽 위에 쌓인 눈이니 머뭇거릴 수 밖에. 그것도 2000미터 높이에서 이 정도라면 더 높은 지역은 어떨까 함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되돌아갈까 하다 일단 계속 오르기로 했다. 가다가 내 힘이 부쳐 더 이상은 곤란하다고 판단되면 지체없이 돌아서기로 했다. 소위 ‘정상 정복’에 대한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단지 내 자신과의 싸움판을 다시 한번 멋지게 펼치고픈 마음이었다. 군데 군데 허벅지까지 빠지며 조심조심 올랐다. 여기 저기 안전자일이 쓸 수 없을 정도로 눈에 파뭍혀 손으로 눈을 찍으며 자일을 대신해야 했다. 그것도 경사 50도 가량 되는 곳에서. 가끔씩은 내 산행 능력에 있어 한계에 부딪친 건 아닐까 하는 자문도 했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신하는게 아닌가 말이다. 근데 왜 돌아서지 않았을까? 돌아설까 말까 하는 의구심을 잊어버렸던 듯하다. 대신 매 순간 순간 내게 닥친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모든 집중력과 체력을 모았던 듯싶다. 다시 말해 방금 전 눈길을 피하느라 난이도 높은 암벽타기를 일부러 골라 치뤘고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또 닥칠까 하는 생각에 휩싸이지 않고 대신 지금 여기 내게 닥친 어려움을 어떻게든 이기고자 온 신경을 썼던 게다. 이런 모습으로 얼추 7시간 오르니 꼭대기 언저리 빙하지역까지 들어섰다. 그런데 이건 또 뭐냐, 갑자기 안개 내지는 구름이 몰리더만 시야 5미터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 꼭대기에 이르는 암벽을 어디서부터 타야 할지 문자 그대로 오리무중이었다. 그래 서너번 누구없소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어느 정도 방향을 잡기에 도움이 되지 싶어서였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 넓은 지역에 사람이라곤 나 혼자였다. 일부러 사람들 찾지 않는 곳을 골라 산행을 즐긴다만 이 정도로, 그것도 내려갈 때까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던 산행은 또 처음이다. 그런데 한 순간 햇빛이 엷게나마 잠깐 비추더만 암벽 위에 표시된 빨간 점이 눈에 띄었다. 아, 산신령님께서 도움을 주셨던 게다.  



저그 위에 꼭대기 십자가가 보인다. 안개와 구름의 뒤범벅 속에서 산신령의 도움으로 오르는 길목을 찾았던 기억은 여적 생생하다.


꼭대기에 박힌 십자가를 꼭 껴안고 계곡 쪽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환호의 목소리였다. 안개와 구름으로 사방 경치는 즐길 수 없었으나 내 마음이 벌리는 축제판은 분명 맛볼 수 있었다. 해낸 게다, 내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또 하나의 숨은 나를 산행 중 산이라는 자연과 맞부딪치며 벌린 싸움을 통해 밖으로 펼칠 수 있었던 게다. 이 기쁨에 아우러져 방명록에 내 왔다 갔노라 하는 흔적을 남겼다. 보니 진짜 눈 온 뒤 내가 꼭대기를 밟은 첫 사람이었다. 춤을 추며 한판 더 신나게 놀까 하다 시계를 보니 오히려 서둘러 내려가야 할 때임을 인지했다. 그렇지 않으면 산 속에서 어둠을 만나니 말이다. 그것도 높이가 거의 2800미터이다 보니 내려가는 시간 또한 꽤 걸림을 알고 있었다. 한 바퀴 돌고자 하니 올라오는 길 반대로 내려 갔는데, 이건 또 뭐냐, 그 곳 역시 무지 가파른 암벽에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신발은 이미 속까지 푹 젖어 있었고, 바람은 아주 세차게 불어대고, 안개와 구름은 걷힐 줄을 모르고,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사고 없이 하산을 해내고자 하는 의지 뿐이었다. 몇 번 굴르고 미끄러지고 하며 어려운 지역을 벗어나니 야생염소 서너마리가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지나가도 도망가지를 않더만. 웬 모자른 녀석이 이런 날씨에 경사진 암벽 위의 눈길을 헤치며 산행을 하는가 하는 눈치였다. 이게 떠오르자마자 자존심이 상해 화가 솟구쳐 소리를 냅다 질러댔다. 여기가 니들만의 산이냐, 오늘 만큼은 내 산이기도 하다 자식들아. 



내림길. 이 가파름에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과 싸워야 했다. 허나 때론 눈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이 사람아, 나 살아 돌아왔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녀석이야, 나 말이야. 함께 머무는 사람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더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