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힘
HOHENZOLLERN: Du Rasender!
Und worauf stützt sich deine Sicherheit?
DER PRINZ VON HOMBURG:
Auf mein Gefühl von ihm!
Heinrich von Kleist(1777-1811)의 대표적 희곡작품 Prinz Friedrich von Homburg의 한 구절이다. 호헨쫄러른이 프린쯔한테 너의 그 확신은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물으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내 느낌. 어떤 외적인 상징물도 아니고 논리적 사유도 아닌 바로 느낌에 자신의 확신을 근거지우는 모습에 나는 옷매무시를 다시 한번 고치고 앉아 마음을 다시금 가다듬는다.
큰 소리다. 특히 그 당시의 독일정신계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소리이니 더욱 돋보인다. 칸트가 확실성의 근거를 인간 자의식의 내부 구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우고자 했던 시대였으며, 피히테가 이러한 칸트의 철학을 이어받아 나름대로 절대자아라는 절대절명의 뒷받침을 통해 우리의 모든 인식들의 확실성을 근거짓고자 했던 바로 그 시대였다. 이런 와중에 클라이스트라는 젊은 언어예술가가 나타나 에이 모두 귀찮다, 우리가 찾는 그 확신 내지는 확실성의 근거는 바로 우리의 느낌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이다.
느낌?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고 또 때론 내가 어떤 느낌을 품고 있는지조차 모를 경우를 종종 겪곤 하는데 내 어찌 이를 바탕으로 확신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모임에서 때론 싫으면 싫은거야 하는 소리를 내지르곤 한다. 마음이 도저히 동하지 않는 일에 왜 내가 일부러 사서 고생하며 참견을 하려는가 하는 자문 또한 종종 떠올리곤 한다. 왜 그런지 정확히 말로 표현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건 나와는 인연이 전혀 없는 일이야 하는 느낌이 꽤 강하게 덮칠 때를 겪곤 한다. 그것도 내 도저히 물리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세차게 몰려오면 내 어쩔 수 없이 그 느낌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또 다른 한편 달리 행동함이 옳은 줄 내 버젓이 알면서도 한갓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해 안달하는 그런 모습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즉 언어를 통해 명확한 사고의 정화기를 거친 후에 감정의 손길이 뻗치는 모습이 아니라 그 정화기가 등장하기 전에 마음(의식)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원초적 느낌을 말하고자 하는 게다. 물론 후에 이에 따른 행동이 언어를 통한 정화기의 작동 이후 반성되며 수정되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언어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그래 어둡다는 이유로 철학함의 대상에서 제외함은 구더기 잡기 위해 초가산간 태워버리는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예컨대 좋고 나쁨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로 잴 수 없는 우리 삶 속의 수많은 행동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언어로 나타나는 합리성만을 걸맞는 잣대로 상정함은 사람을 합리성의 산물인 기계로 바라봄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자문해 본다.
결국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의 잣대로 삼고자 하는 합리성이 과연 사고를 통한 논리적인 모습만 보인다면 그게 과연 인간을 위한 합리성일까 하는 질문을 이어 던질 수 있다. 오히려 느낌이 동반되는, 느낌으로 뒷받침되는 합리성이 우리에게 걸맞는 합리성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