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함에서 이기는 법
"Im Rennen der Philosophie gewinnt, wer am langsamsten laufen kann. Oder: der, der das Ziel zuletzt erreicht." (Wittgenstein, VB 1938)
서랍 정리를 하다 아기손바닥 크기의 누런 수첩이 문득 눈에 띄어 펼쳤더만 비트겐슈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학이라는 뜀박질에선 가장 느리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이긴다. 또는: 목적지에 꼴찌로 도착하는 사람."
언뜻 보기에 '또는'으로 이어지는 두 문장들이 동어반복이지 싶기도 하다. 가장 느리게 달리니 꼴찌일 수 밖에. 그런데 조금 더 뚫어지게 바라보면 그렇지도 않은 게, 느리게만 달릴 수 있다면 철학자다 하면 그냥 하릴없이 우왕좌왕 빈둥거리며 히히덕거리는 짓 또한 철학함이라는 오해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와는 달리 뚜렷한 목적을 품고 이에 한 웅큼씩 가까이 다가서는, 단지 이 다가섬에 최고의 느릿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외침이 아닐까 말이다. 산을 오름에 있어 무턱대고 덤벼 헤매는 모습보다는 그래도 꼭대기에 발자국을 디딛고자 사전에 어떠한 경로를 거쳐 오를 것인가등의 계획을 짜는 모습이 더 철학적이라는 말이지 싶다. 단지 느리게, 가장 늦게 꼭대기에 오르는 산행이 가장 철학적이다라는 그의 주장이다. 근데 왜? 아니 늦장을 부릴수록 더 철학적이다 함은 도데체 어디에 근거를 두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바탕을 소위 유럽-미국적 문명화에서 찾기를 꺼렸다. 오히려 딴 데서, 딱 꼬집어 어디라고 말하기는 힘드나 유럽-미국적 문명화의 전형에서 크게 이탈한 문화적 모습을 가리킨다. 전자가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단계적으로 쌓아나가는모습을 그리며 보다 더 크고 복잡한 구조를 자신의 전형으로 삼는다면 후자는 이와는 달리 어떠한 구조든 그 투명성과 뚜렷함을 추구하는 모습을 자신의 전형으로 삼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철학함은 "세계를 변두리를 통해 - 그 다양성 속에서 - 이해하고자 한다"고 말하며 이는 세계를 "중심에서, 즉 본질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유럽-미국식 전통과 구분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적 서양철학이 지속적인 단계적 상승을 추구한다면 자기철학은 이와는 달리 항시 있는 자리에 머무르며 언제나 같은 것을 이해하고자 애쓴다는 비교를 통해 구분 짓는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는 일직선을 긋는 반면 후자는 원을 그린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러니 그런 철학자가 뜀박질에서 이길 도리가 없는 게다. 아니, 처음부터 뜀박질로 겨루어 보겠다는 욕심을 내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이는 마치 중학교에서 매 수업시간마다 조는 아이가 세계졸음대회에 나가 이길 수 없는 이치와 비슷하다. 왜냐고? 이 아이는 수업시간에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졸지만 쉬는 시간엔 또 누구 못지 않게 또렷히 깨어 있기 때문이다. 50분간 졸고 쉬는 시간 10분 동안 깨었다가 또 수업 종이 울리면 다시 졸기 시작하고 말이다. 자리 보고 다리 뻗으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