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편지 – 재귀 대명사
알프스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시간 있을 때 찾는 휴식의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복판으로서 알프스를 골랐습니다. 찾을 때마다 이상스레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에 감싸이니 그 고마움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삶의 터전을 세우기로 한 게지요. 내게 주어진 숨쉬는 시간 동안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겠다 싶은 희망도 아울러 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삶이 곧 일이라는 저의 믿음에 비추어보면 말이지요.
새로 살 곳이 정해지면 지난 20여년 간 묵었던 이 곳 뮌헨을 떠납니다. 그것도 뮌헨의 중심부 슈바빙, 제가 처음 발을 딛고부터 줄곧 살아온 동네입니다. 우리에게 60년대 독일 젊은이들이 가꾸었던 거리의 자유스런 분위기로 꽤나 잘 알려진 동네입니다만, 사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찾기 힘들고요, 단지 거주인들의 20% 이상이 외국인들인지라 어쩔 수 없이 자유스럽고 개방된 사고방식 없이는 이 곳서 살기 힘듦은 여적 옳습니다. 제 보기에 여기 사는 대부분의 독일사람들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는 듯 하고요. 자라온 환경이나 사고방식 등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니 한편 이런 저런 불편한 문제들이 시도 때도 없이 생기곤 합니다만 반면 이러한 다양성이 각자에 주는 생의 풍부함이란 엄청난 선물을 받는 셈이니 그 불편이 덮어진다 보입니다. 단지 이에 있어 주민들 서로간 이해가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겠지요. 나아가 이를 위해 외국인들은 우선 독일말을 배워야 함은 마땅합니다. 서로 말을 주고받음 없이 한 공동체의 일체성은 사실 이루기 힘든 모습이니 말이지요.
저는 특히 이 곳에 철학을 공부하러 왔으니 말글이 이 공부에서 차지하는 핵심적 역할을 떠올리건대 남다른 노력을 이에 쏟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유학기간을 통틀어 가장 힘든 시기였지 않나 싶네요. 독일어 자체의 어려움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혀가 짧아 남들과의 짧은 대화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어 곤혹했던 꿀 먹은 벙어리 신세 시절은 제게 적지 않이 정신적 고통을 부여했었죠. 더군다나 하루라도 빨리 대학 수업을 받고자 했던 욕심에 눌려 이역 만리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건만 하는 생각을 하시라도 놓지 않았던 하루하루였으니 말입니다. 아이레의 문호 Beckett이 젊은 시절 독일 여행을 했을 때 남긴 말이 떠오르는군요:
“제기랄, 침묵하는 것까지 외국어로 배워야 하니, 참!”
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에도 뭐 마찬가지였지요. 아니 어째 갈수록 어려워지는 듯 했으니 당황스러워지더군요. 특히 이공계라면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으니 웬만하면 하련만, 언어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는 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자 했으니... 그래 앞으로도 계속, 아니 더 열심히 해야 할 말 공부이매 이 말 내지는 글에 대한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음은 뭐 놀라운 일이 아니죠. 말 그 자체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단어 하나 하나의 쓰임새, 그러니까 독일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독일어를 어찌 사용하는가에까지 제 귀는 항시 집중을 하고 있는 게죠. 그러니 거의 매일 애꿎은 머리카락이 무지 빠지더군요. 섬짓할 정도로.
이러한 말의 흐름 속에서 제 눈에 확 뜨이는 독일 사람들의 언어 사용 모습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제가 가장 사랑하는 독일말로 꼽는 doch나 재귀대명사의 사용인데, 오늘은 재귀대명사에 대해 짧은 말씀 드립니다. 이 대명사는 우리말의 ‘자기’, ‘자신’, ‘저’ 내지는 ‘스스로’ 등등에 해당하는, 다시 말하면 말하는 자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문장에서는 한 동사의 주어가 동시에 목적어가 되는 경우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대명사죠. 아니 우리말에도 있는 말들이 궂이 눈에 확 띄는 이유가 뭐냐? 하고 묻고 싶으시죠? 별다른 이유는 없고요, 단지 이 사람들이 재귀대명사를 일상생활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빈번히 사용하고, 동시에, 뭐라할까, 그 사용 강도가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앉다라는 말을 보죠. 손님이 찾아왔을 경우 “앉으시죠.”하는 건네는 말을 독일말로는 - 문자 그대로 옮긴다면 -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앉히십시오.”라 합니다. 내가 그냥 앉아 있는 상태를 말하고자 할 경우엔 우리와 같이 “앉아 있다.”라 말하지만 앉는다는 동작, 즉 몸의 이동을 표현할 경우엔 재귀 대명사를 꼭 써야 하지요. 딱 한 가지 예외는 허나 있어요. 개한테 앉으라 명령하는 말은 그 상태를 말하는 앉다를 씁니다. “Sitz!" 그러거든요. 마치 영어의 sit down과 상응하는 셈이죠.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동사의 주어와 목적어가 일치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동사 앉다의 경우 앉히는 자와 앉혀지는 자가 동일인라는 소리죠. 이를 약간 그림 그리듯 말씀 드릴 수도 있어요. 다시 그 문장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앉히십시오.”를 보죠.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 나는 나 스스로를 앉힙니다.” 말할 경우, 말하는 당사자가 우선 입을 떼며 “나는...”하는 말과 동시에 자기 자신은 머릿 속에 잠재적으로 그리고 있는 앉히다라는 피동사의 주어로 등장합니다. 허나 연이어 “나 스스로를...”이라 말하는 순간 그 주어는 동시에 같은 동사의 목적어로 등장하게 되죠. 그러니까 이 문장을 말하는 순간마다 당사자는 이러한 주어와 목적어의 동일성을 머릿 속에 새로이 상기하게 되는 셈입니다. 동사를 중심으로 매번 너와 나가 일치한다는 말이지요. 바로 이런 식으로 언어 속에서 한 행동의 주체가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사고의 흐름을 조절하는 힘을 바로 재귀 대명사를 이용한 표현이 갖고 있는 셈이고요.
이러한 자기 反省적 언어, 스스로를 다시금 비추어보는 사고 방식이 어쩌면 체화되어 있는 듯한 언어 문화권과 그렇지 않은 언어의 그것을 상호 비교해 봄 또한 흥미로운 일거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