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한국에선 언제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습니까?
그: 1903년이지요, 그 당시 인천에 들어와 있던 영미연초회사에서 담배를 선전하기 위해 회사 창고에서 지금의 영화에 상응하는 활동사진을 공개했습니다.
나: 무료였습니까?
그: 아니지요, 영업 이득을 생존의 목표로 삼는 회사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입장료는 담배 빈갑 20개였다 전해집니다. 그러니까 자회사 담배를 열심히 핀 사람들에 한해 보여준 영화였지요.
나: 어쨌든 그 영화 내지는 활동사진은 엄격히 말해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고는 보기 힘들고 오히려 상업적 마케팅 수단에 불과한 선전물이라 해야겠네요. 그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상영된 영화예술적 작품은 무엇입니까?
그: 1923년 윤남백이 발표했던 '월하의 맹세'로 볼 수 있을 겝니다. 단지 이 또한 그 당시의 상황적 논리에 맞추다 보니 일본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서 조선총독부를 통해 저축을 장려시키기 위한 목적이 다분히 섞여 있었지요. 다분히 선전영화적 냄새가 풍긴다고나 할까요?
나: 결국 한국 영화는 그 예술적 측면에서 바라보건대 출발점에서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군요. 우리의 민족과는 유리된 채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 및 식민지의 고정화를 위한 정책적 일환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지금은 뭐 다릅니까?
나: 전혀 딴 판이라 하기엔 좀 뭐 하지만 그렇다고 똑같다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싶네요.
그나저나 그럼 우리 민족의 예술적 자산이라고 할만한 작품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그: 아마 나운규의 '아리랑'을 꼽을 수 있을 겝니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의 한을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담고 있는 영화이니 말입니다.
허나 이러한 사실을 묵과하지 않으려는 일제이었기에 '조선영화법'이라는 검열제도를 신설했고 1942년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영화를 묶을 속셈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를 만들어 모든 단체를 강제로 통합시켰지요.
나: 그럼 해방 후에는?
그: 50년대의 제자리 찾기를 위한 몸부림 후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수입 영화에 엄청 쫓기는 판에 60년대 즉 1962년에 박정희 정권의 소위 '영화법'이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그 이후 우리 영화계는 완전 고꾸라질 판이었지요. 심지어 "남은 것은 영화법이요, 잃어버린 것은 영화 그 자체였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예술에 바탕이 되어야 할 자유가 소멸된 상태에서 무자비한 사슬에 묶여 있어야 될 상황이었지요.
나: 지금은 허나...
그: 다음에 또...
그: 1903년이지요, 그 당시 인천에 들어와 있던 영미연초회사에서 담배를 선전하기 위해 회사 창고에서 지금의 영화에 상응하는 활동사진을 공개했습니다.
나: 무료였습니까?
그: 아니지요, 영업 이득을 생존의 목표로 삼는 회사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입장료는 담배 빈갑 20개였다 전해집니다. 그러니까 자회사 담배를 열심히 핀 사람들에 한해 보여준 영화였지요.
나: 어쨌든 그 영화 내지는 활동사진은 엄격히 말해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고는 보기 힘들고 오히려 상업적 마케팅 수단에 불과한 선전물이라 해야겠네요. 그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상영된 영화예술적 작품은 무엇입니까?
그: 1923년 윤남백이 발표했던 '월하의 맹세'로 볼 수 있을 겝니다. 단지 이 또한 그 당시의 상황적 논리에 맞추다 보니 일본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서 조선총독부를 통해 저축을 장려시키기 위한 목적이 다분히 섞여 있었지요. 다분히 선전영화적 냄새가 풍긴다고나 할까요?
나: 결국 한국 영화는 그 예술적 측면에서 바라보건대 출발점에서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군요. 우리의 민족과는 유리된 채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 및 식민지의 고정화를 위한 정책적 일환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지금은 뭐 다릅니까?
나: 전혀 딴 판이라 하기엔 좀 뭐 하지만 그렇다고 똑같다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싶네요.
그나저나 그럼 우리 민족의 예술적 자산이라고 할만한 작품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그: 아마 나운규의 '아리랑'을 꼽을 수 있을 겝니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의 한을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담고 있는 영화이니 말입니다.
허나 이러한 사실을 묵과하지 않으려는 일제이었기에 '조선영화법'이라는 검열제도를 신설했고 1942년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영화를 묶을 속셈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를 만들어 모든 단체를 강제로 통합시켰지요.
나: 그럼 해방 후에는?
그: 50년대의 제자리 찾기를 위한 몸부림 후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수입 영화에 엄청 쫓기는 판에 60년대 즉 1962년에 박정희 정권의 소위 '영화법'이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그 이후 우리 영화계는 완전 고꾸라질 판이었지요. 심지어 "남은 것은 영화법이요, 잃어버린 것은 영화 그 자체였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예술에 바탕이 되어야 할 자유가 소멸된 상태에서 무자비한 사슬에 묶여 있어야 될 상황이었지요.
나: 지금은 허나...
그: 다음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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