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

선거유세

서동철 2010. 4. 20. 17:27

이즈음 대한민국 사회에 다시금 선거철이 무르익어간다. 이에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 모습이다:


나도 어렸을 때 선거유세를 벌린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유세였다. 중학교 다닐 때 전교회장 선거에 내가 출마했던 게다. 출마하지 않겠다 했더만 담임선생이 몽둥이 들고 나가라 해 억지로 나섰던 사연이다. 난 지금까지도 왜 그 양반이 몽둥이까지 들고 설쳤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후보자들이 대여섯 명 되었다 기억하는데, 그 중 나와 꽤 친하게 지냈던 녀석이 제일 강력한 상대였다. 마치  서울의 한명숙과 오세훈 마냥… 이라 하면 많이 지나치다 싶다만. 

어쨌든 각 후보는 정해진 날 단상에 올라가 유권자들 앞에서 후보연설을 해야 했다. 근데 이거 우습게 보면 큰 코 다친다. 우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최소한 일미터 가량 높은 단상에 올라가 허벅지 떨리지 않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 목소리가 튀어 나와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이거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짜릿한 맛을 모른다. 두려움과 기쁨이라는 이중적 뜻에서의 짜릿함을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당연 남들보다 자기를 뚜렷이 돋보이는 연설 내용과 그 전달방법이 연출되어야 한다. 때론 그래 도박하는 마음으로 모험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 때 연설 끄트머리에서 짜장 도박을 했다. “여러분들이 만약 저를 지원해 주신다면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소리를 두 팔을 만세하듯 쫙 뻗치고 두 손을 활짝 펼치며 외쳤던 게다. 근데 이게 도박이었던 게, 만약 이 순간 박수가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개표소에 아예 갈 필요조차 없다. 허나, 봐라, 약속이나 한듯 우렁찬 박수소리가 내 귀를 울렸음에 나는 단상을 내려오며 승리의 웃음을 머금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바로 내 뒤에 위에 말한 녀석이 단상에 올랐다. 나는 후보자 자리에 앉으며 내 귀를 울린 박수소리의 단맛을 만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만큼 자신만만했다는 말이다. 자식, 니가 뛰어야 벼룩이지 했지 싶다. 어, 그런데 말이다, 그 녀석 뛰는 폼이 벼룩이 아니라 최소한 메뚜기는 되어 보였다. 연설 도중 각본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도리 없는 모습을 보였던 게다. 갑자기 말을 잇지를 못하고 “어, 잠깐만!” 하더만 자기가 연설할 내용을 깜박 잊었다고 유권자들 앞에서 뒷통수를 긁적긁적 해대고 머뭇거리며 솔직담백하게 고백한 뒤 바지 뒷주머니에서 연설문을 적은 종이를 꺼내 이를 읽어 외치는 재치를 맘껏 자랑하니 유권자들 속에서 폭소가 터지고, 이게 시쳇말로 그 날의 대박이었다. 나의 정공법을 꺽기에 충분할 만큼의 힘을 지녔던 돌발적 옆차기였던 게다. 나중에 너 그거 사전에 연습했냐 물었더만 절대 그렇지 않다며 그런 걸 사전에 어찌 연습하냐며 도리어 내게 따지며 대들었다.  


개표 후의 유권자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힘의 불균형은 투표결과에 그대로 나타났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선이 되었는데, 그 녀석한테 몰린 표들 중 상당수가 무효표로 처리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후 졸업할 때까지 이 녀석한테 진정한 전교회장은 니가 아니라 나야 나 하는 소리를 마주칠 때마다 들어야 했다. 선거발표 날 사실 이 소리 매번 듣기 귀찮고 속쓰릴 게 불편해 그 자리 그냥 주려 했는데 이 또한 선거법 위반이라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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